아나데마
67.아나데마(άνάθεμα)의 삶.
- 로마서 101 “아나데마”본문중에서...
(롬9:1-2)
1.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 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 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2.1절에 포함됨
3.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아나데마άνάθεμαG331)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 위를 설명하는 구분
- 아나(άνάG303); 공간적이지 않은 다른 차원의 위; 위로남,거듭남(아노덴ἄνωθενG509)으로 이해함
- 에피(έπίG1909): 공간적인 위.
* 아나데마(άνάθεμα)는
아나(άνάG303) + 티데미(τίθημιG5087)
- 진리를 알게되면 똑바로 서게 됩니다.: 횡적인 바로섬,똑바로 섬
히)쿰,(자료실 10-2참조)굳게세움(쿰קוּםH6966)
헬)히스테미(ἵστημιG2476)입니다.
-파생된 단어가 스타우로스(σταρυόςG4716)-언약의 기둥
* 히스테미를 위해서 횡적으로 진열,진설,배설 해놓거나
이런 것을 (성전,율법,예수,성경,세상,나...모든 것..차서로 진열해 놓은 것)만화 게임처럼 하나 하나 먹고 그걸 진리로 알아
똑바로 서게 되면 히스테미라고 합니다.
* 아나데마(άνάθεμα)는 그 하늘의 것 위에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 아래에서
그러한 것으로 그 진리를 담은 그릇으로 내가 그렇게 사용된다 할지라도 ...라는 뜻입니다.
중요한 건 그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그 성전,그 율법,그 예수는 그 내용의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이 땅에서 파괴되어집니다.
성전,율법은 진리로 완성이 되어야 합니다.
성전 그리스도의 영, 진리의 말로 완성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의 영,진리로 완성이 되어야 합니다.
아나데마(άνάθεμα)의 삶을 살아야 되는 이들은 파괴되어져야 함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삶속에...자기의 시간속에...
.........
사도바울이 그렇게 되어서 너희들에게 내가 진리를 설명하는 존재 였으면 좋겠어 마땅이 당연히 그렇게 될거야
그렇게 위에 것을 설명하기 위해 아래것으로 존재하다가 때가 되어서
그가 담고 있는 생명이라는 내용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이 파괴를 감수하는 그 행위을 축약하면
아나티데미,아나데마(άνάθεμα) 의 삶인 것입니다.
그 모양대로 진리를 못 알아 보고 그대로 표피적으로 해석해 버리면 율법,성전이고 그게 저주입니다.
그래서 아나데마를 저주라고도 해석하고...
그 건 그렇게 해석 하면은 안되는 거죠
그 율법 그 제사는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였잖아요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아 그 걸 안하는 존재로 되게 되라고 준 것입니다.
그래서 “금하다”라는 내용으로도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사전만 보고 원어를 공부한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전만 보고 아나데마가 “금하다,저주하다”이니까 당연히 내가 저주받아서
지옥에 갈지라도 내 민족이 구원받으면 나는 괜찮다.
이렇게 여러분이 이해해 버리면 안됩니다.
그 단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그렇게 그런 내용을 가지고 있는가 까지 올라가서
그 내용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율법주의자들에게 참 진리를 간곡히 어필하기 위해 그 역할을 담당하겠다고
강렬하게 소원을 애기하고 있는 겁니다.
결코 자기 자신이 저주를 받아 지옥에 가도 복음만 전해지면 괜찮다 라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영생,구원,죄와 지옥,땅들의 세상이 어떤 것인지 아는 자들에게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어떻게 돌아갑니까 그게 사망이고 멸망인데....
어떻게 그 걸 바꿉니까
내 구원과 하나님과의 단절이라는 그 지옥의 현실이 어떤것인지 처절하게 경험해 본 사람은 안된단 말입니다.
그건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거룩한 은혜,긍휼,능력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란 말입니다.
인본주의적이며 박애주의적인 안경이 사도바울이라는 한 사람을 위대한 성자로 만들어 버리는 번역을 해 놓은 겁니다.
모든 인간들이 성자로서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된다 헌신,사랑,믿음,희생...등 가져야 되는게 아닙니까
우리도 그렇게 보는 겁니다.
진리를 아는 존재들이 이렇게 위대해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 속에는 마땅히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라는 오만이 썩여 있는 겁니다.
하나님처럼의 삶,하나님 흉내내기 식의 번역인 것입니다.
절대로 우리의 구원과 그 어떤 것과도 맞 바꾸어서는 안됩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입니다.하나님을 무엇과 바꿀 수 있단 말입니까
안타까운 마음에 피를 토하며 내 안에 그 생명을 전해 줄 수는 있을 지언정 내 목숨 수백개라도 줄 수 있습니다.
이까짓 것은...
그 내 평안이 끊어지고 다른 사람을 평안으로 밀어넣고 싶다는 그런 열망은
절대로 제 안에서는 나오지 않을 겁니다.저는 나오지 않을 거에요 그 만큼 제게는 그 생명이 소중합니다.
바울은 그런 종류의 애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가졌으므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음으로) 사도바울은 아쉬울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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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가 당신을 위해 내가 기꺼히 그 자리로 내려가 내 삶속에서 내가 파괴되고 부정되고
그 진리가 나로부터 설명되어진다면 내가 간절히 원한다.
하나님의 긍휼,은혜,사랑안에서
그리고 그와 혈통적으로 묶여있는 민적적이스라엘 역시 그러한 아나데마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그 자체가 위대하고 가치가 있어서 하나님께 선택된게 아니라
너희들도 위에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땅에서 티데미 진설되어있는 아나데마의 존재들인 것입니다.
너희들에게 위에것을 설명하기 위해 준거 양자됨,영광,언약들,율법,예배,약속들,조상들,,,또한 이걸 근거로
우리는 하나님이 너희에 준 것이지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이고 우리의 열심은 하나님이 흠향하신다
이런걸로 준 게 아닙니다.
꼭 알아 나 조차도 그렇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잘난체 하지말고 진리를 말 할테니 내 말좀 들어라”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나데마의 삶을 살다 갔습니다
아담과 하와 아벨 셋 에녹 노아 셈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엘리아 엘리사
다윗 솔로몬 베드로 바울 요한 예수까지....그런등등 모두가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앎니다 어떤 삶인지 앎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삶에 진리를 새겨 놓으셨어요
그들의 삶속에 도화지에 진리라는 시나리오를 쓰십니다.진리라는 시나리오를...
자신이 택한 백성들에게 자신을 교과서로 주는 겁니다
그렇게 쓰임 받는자들이 아나데마(άνάθεμα)의 삶인 것입니다.
그 티데미의 삶이란 말입니다.
육적인생이 하나님에 의해 차압당하고 몰수 당했다는 말입니다.
그게 그의 발에서 ‘신을 벗은자의 인생’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신을 벗게 하신다음에...
‘신을 벗는다’라는 것은 나를 당신에게 양도합니다.그당시의 쓰인 내용
- 상대방의 발을 몰수하고 거기에 내용을 담아 새발을 줘야합니다.
이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셔서 당신을 그리스도 영 진리 성령으로 두 실 그 제자들에게 제자들의 신을 벗기고
발을 씻어 줍니다.
‘발을 씻는다’즉 영접한다라는 뜻입니다.그리고 내가 너희를 몰수하고 새발을 줄거야
그런 의미에서 물로 진리로 씻어주는 겁니다.
새발을 갖게 됩니다. 그 진리로..
새로운 발은 내 발이 아니라 하나님의 발이기 때문에 이제는 내 마음대로 못가고
그 발이 띠 띄운 그 방향으로 끌려가는 겁니다.
성도의 삶,아나데마의 삶입니다.
이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어렵습니다
그 율법주의자들이 보기에는 그러한 모습을 저주,불행이라 합니다.
그게 그냥 껍데기로 보이면 그 사람들에게는 그냥 저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게 아나데마(άνάθεμα)입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그 아나데마 그 저주의 삶을 산다 할지라도 너희들에게 진리가 전해졌으면 좋겠어,좋겠어...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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