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어두움,낮과밤,저녁과 아침
.빛과 어두움,낮과 밤,저녁과 아침...
- 산상수훈 45“새것을 담은 새그릇”설교본문 기록...
(창1:1-5)
1.태초에 하나님이 천 지를 창조하시니라.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3.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엇고
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14-19)
14.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 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15.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에 비취게 하시며
18.주 야를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고후4:6-7)
6.어두운(스코토스σκότοςG4655-스키아σκίαG4639에서유래;그늘,그림자)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스큐오스σκευος/G4632-그릇)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보배(데사우로스θησαυρόςG2344)’는 어두운데서 빛이 비치라 하신 하나님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3절의“빛이 있으라” - 그 말을 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어두움(호쉐크/חשׂף/H2822)인데 반드시 오르(אוֹר/H216/ 빛)라는 빛으로적어도 성도에게 있어서는 빛으로 이해 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어두움(호쉐크/חשׂף/H2822)”을 나쁘다고 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어두움(호쉐크/חשׂף)과 빛(오르/אוֹר)이라는 것을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쁘다고 구분하지 않습니다.
어두움(호쉐크/חשׂף)은 빛(오르/אוֹר)을 나타내시려고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밤(라일/ליל/H3915)-가르침을 주는 가르침,
밤(라일/ליל)이라는 단어 자체가 무엇인가 가르치기 위해 주신 것이란 말입니다.
낮(욤/יוֹם/H3117)-진리를 주는 것이 낮입니다.그러면 낮(욤/יוֹם)이나 밤(라일/ליל)이나 무엇이 다르지요?
이 밤(라일/ליל)으로 이 낮(욤/יוֹם)을 알면 되는 것 이지요.
그럼 저녁(에레브/ערב/H615)은 무엇이고 아침(보케르/בּקר/H1242)은 무엇입니까?
“저녁(에레브/ערב)”- 무엇인가 덮여있다-파자하면 “아래것으로 시작하는 성전”이란 뜻인데 덮여 있는 것 이지요.
그 안에 무슨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아침(보케르בּקר)”은? – 파괴하고 다시 시작하면 그것을 아침(보케르בּקר)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두움(호쉐크/חשׂף=죄라고도 한다)을 그게 무엇인지 성전을 그대로 성전으로 보면 네 눈이 어둡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그 성전 입니다)
그런데 어떤이의 눈에는 그냥 껍데기로 안보이고 “그렇지 그게 그 내용이지”라고 보인단 말입니다.
그때에 똑 같은 성전을 보는데 어떤이들은 그것을 어두움(호쉐크/חשׂף)으로 보고
어떤 이들은 그것을 빛(오르/אוֹר)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빚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란 말입니다. 다른 종류의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어두움(호쉐크/חשׂף)은 빚(오르/אוֹר)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이고
빛(오르/אוֹר)이라는 것은 어두움(호쉐크/חשׂף)을 나타내는 것이네요.
마찬가지로 “밤(라일/ליל)”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허락한 것입니다.
어두움(호쉐크/חשׂף)을 밤(라일/ליל)이라 했습니다.대부분의 선지서나 구약 또한 신약에서도
“유다가 밤(라일/ליל)으로 갔다”.“니고데모가 밤(라일/ליל)에 왔다.”
이런 “밤(라일/ליל)”이야기를 하기 위해 창세기에서부터 그 개념들을 정리해주시는 것입니다.
밤(라일/ליל)이라는 것이 뭔가를 가르치기 위한 그 가르침이 밤(라일/ליל)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처럼 밤(ליל)을 통해서 아 “빛 이구나”를 알면 그게 낮(욤/יוֹם/H3117)입니다.
- 그것이 진리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덮여있던(저녁/에레브/ערב) 것이 부셔지고 파괴되었던 것이
다시 세워지니까(아침/보케르בּקר) 나에게 보여 집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것들은 둘이나 짝이기 전에 하나인 것 입니다.
이건 좋고 저건 나쁘고 이렇게 구분하라고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두운데서 그 것을 빛으로 아는 이들이 있으라”하는 그 분이
그 예수 그리스도라는 얼굴에(껍질에) 있는(프로소폰/πρόσωπον/G4383/얼굴- 얼의 꼴= 영의 모양)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마음에 비춘 그 것을 “보배”이다.
그 보배를 마음에 가지고 있으면 그가 보배를 가진 질그릇입니다.
- 산상수훈(49) ‘눈이 성해야 온 몸이 밝다’-본문중에서......(이하)
말씀은 분명 아래의 말과 소리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진리로 깨달아 알았을 때 그 어둠의 말은 빛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성전이라는 것을 성전이라는 모양과 형식으로 받아 버리면
그게 어두움인 것이지만
그 성전을 통하여 진리라는 내용을 알았을 때 그 똑같은 성전이 그 내용을 안 사람에게는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등장하는 빛(히:오르(אוֹר/H216), 헬:프호스(φως/G5457)이라는 단어는 전부 ‘말’과 관련이 있습니다.-밝아지다,밝다,빛나다
히브리어 ‘오르(אוֹר)’는 ‘마오르(מאוֹר/H3974)’로 빛을 내는데
그 뜻은 ‘진리를 말씀하기 시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오르(אוֹר)’라는 것은 마오르라는 어떤 도구로 빛을 내라 하십니다.
그 빛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모릅니다
아직 말광채가 생겨 나기도 전에 창세기 1장 3절에 빛이 생겨 났습니다.
‘빛이 있으라’ 먼지를 모릅니다.
파자를 해도 ‘하나님이 시작하셨다’이게 빛의 의미입니다 무엇을 시작하십니까?
넷째 날에 그 빛을 발하는 ‘마오르(מאוֹר/H3974)’가 나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문법에서는
‘멤מ’이 앞에 붙어버리면 그 동사가 행해지는 장소가 됩니다.즉 빛이 비추어지는 어떤 것,어떤 곳으로 해석을 합니다
1장 3의 그 빛이 그것을 통하여 비추어지는데 마오르(מאוֹר/H3974)라 합니다.
진리를 말하기 시작하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1장3절에 그 빛이 먼지 넷째날까지 오기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무슨 빛인지 우리가 보는 이런 빛은 아닐거 아닙니까 먼지 모르는데
넷째 날 마오르(מאוֹר/H3974)(큰광명,작은광명)입니다
그 마오르가 1장 3절의 그빛을 비추는 도구인데 그 비추는 도구가 마오르라고 쓰여 있는데
그 단어가 성전안에 그 촛대란 단어로 쓰입니다
무슨 연관이 있을거 아닙니까
그 단어자체의 의미는 진리를 말하기 시작하는 하나님 이걸 비추다.빛이야 라고 합니다.이게 광명이야
헬라어 ‘프호스’는 ‘훼미(φημίG5346)’라는 단어-말하다, 선언하다
동사 훼미는 파오(phao: 빛나다, 비치다)에서 유래했으며
와 ‘프흐뎅고마이(φθέγγομαι/G5350)’-말하다,선언하다와
맥을 같이 하는 단어인데
‘훼미(φημί/G5346)’는 ‘이야기 하다, 말하다’라는 뜻이고
‘프흐뎅고마이(φθέγγομαι/G5350)’는 ‘분명한 소리로 말하다’라는 단어입니다.
마오르도 하나님이 진리로 말씀하기 시작하신다고 프호스도 점도없고 흠도 없이 거짓없이
똑바로 말하는 이라고 그런 뜻을 가지고 있으니까성경에서 빛이라는 단어는 그 진리의 말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 빛을 비추기 위해서는 올바른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빛을 비추는 완전한 몸이 된다 22절은 말씀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빛’이라는 것은 어두움에 속한 아래의 것들을 위의 것으로 보아 분명한 소리로 말할 수 있을 때,
그것을 빛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볼 수 있게 해 주신, 내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
그 말씀을 진리로 보게 하는 능력을 ‘눈’이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눈이 올바르지 않으면 빛이 비추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빛, 광명(마오르/מאוֹר)’이라는 단어를 성소 안의 ‘등대’라는 말로 쓰는 것입니다.
성소 안의 일곱 등대는 성소 전체를 밝히는 빛입니다.
그런데 일곱 등대입니다. – (창세기의 일곱 말,)
즉 하나님의 언약,약속,실컷먹이다입니다.
하나님의 ‘일곱 말(언약)’이 성전의 의미를 올바로 밝히는 유일한 빛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빛은 절대로 꺼트리면 안된다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언약이야기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성경전체를 올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계4:5-6)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 하더라
보좌 앞의 일곱 등불이 뭐라고 해요? 일곱 영, 즉 일곱 눈입니다.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을 담고 있는 것이지요?
말씀이 하나님이라는 진리로 깨달아지지 않으면 그 등대에는 등불이 켜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계21:22-23)
22.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성전은 제사를 열심히 드리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배워야 하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요 어린양이라고 하잖아요?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즉 성도들에게는 더 이상 다른 빛이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왜요?
하나님의 영광이 바로 빛이고 어린양이 바로 그 등대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그 성령,그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여호와를 힘써 섬겨라가 아닙니다.
그것을 알아버린 이들에게 왜 다른 빛이 필요하겠어요?
아니 애초부터 ‘빛’이라는 개념은 어두움을 내용으로 알아버리면 그것을 빛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창세기 1장 2절까지는 빛이 없었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깊음 뿐 이었습니다.
그 깊음(테훔תּהוֹם/H8415)을 세 번째 날에서 ‘바다(얌יםH3220)’라 칭하기로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그 깊음의 이름을 ‘어둠(호쉐크חשׂף)’이라 하자고 2절에서 약속을 하지요?
그러니까 그 아래의 물, 즉 이 세상과 율법과 성전과 인간과 어두움과 죄와 예수까지도,
그것이 담고 있는 진리라는 내용으로 밝혀지게 되면, 그 자체가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어린양이 바로 빛이라고 성경이 결론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계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그 하나님이 누구인지 우리에게 밝히 계시가 되자 다른 것들 모두 모형이고 상징 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떠세요?
눈이라는 것, 등대의 빛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내용으로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지요?
마지막 확인 도장을 찍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요1:1-5)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 하더라
말씀이신 하나님이 이 어두움의 땅에 오셨습니다.
무엇을 하기 위해 오신 겁니까?
그 어두움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치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을 빛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두움을 빛으로 잘 깨달아 알면 그게 바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두움에 속한 자들은 자력으로 빛을 볼 수가 없어요. 그들은 눈이 성하지 않은 소경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소경들에게 빛을 볼 수 있는 눈을, 영으로 선물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소경이라는 자인식이 먼저 있어야 해요.
그런데 모든 사람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스스로 보는 자라 여기며 살더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