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1 사울(솨울h7586-큰자). 바울(파울로스g3972-작은자)
서울서머나교회
116-1. “사울(솨울שׂאוֹלH7586-큰자) ,바울(파울로스ΠαυλοςG3972-작은자) ” ... - 로마서 강해(3). “바울, 바울,바울 ”본문기록...
사울이라는 이름의 배경을 한번 추적해 보겠습니다. (솨울שׂאוֹלH7586-간구한바 된,요구한,구걸하는 자,걸인...) (헤브라이오스ἙβραιοςG1445-히브리인,유대인) - (에벨ἘβέρG1443-족장고명)에서 유래 :기원(에베르עברH5677-에벨,헤벨,에베르עברH5676-건너편지역,반대편,항상 동쪽을 의미) - (아바르 עברH5674-지나가다,건너가다,사라지다,소멸하다,성내다...)에서유래
바울은 베냐민 지파 사람입니다. 베냐민 지파 사람 중에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갔던 사람이 누굽니까? 다윗 이전에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사울 왕입니다. 사울왕은 누가 뭐래도 베냐민 지파 사람 중에서 가장 출세를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베냐민 지파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울이라는 이름은 힘의 상징으로, 부의 상징으로, 명예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그건 이스라엘의 역사서에서도 입증이 된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 사람들의 이름 중 가장 인기 있던 이름이 사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울이라는 왕은 하나님이 택한 왕이 아니라 사사 시대를 지내면서 하나님을 왕의 자리에서 밀어내고 인간적인 왕을 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판단에 의해 세운 왕이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사울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하게 수려했다고 합니다
(삼상9:1-2) 1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 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스롤의 손자요 베고랏의 증손이요 아비아의 현손이라 베냐민 사람이더라 2 기스가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솨울שׂאוֹל)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 하더
이게 힘의 원리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취향입니다. 키가 어깨 위로 크다는 말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흔히 쓰던 관용어로서 외모 뿐 아니라 성품이나 능력에 있어서도 아주 뛰어난 사람을 가리키던 말이었습니다. 힘의 원리 속의 죄인들은 그런 자들을 훌륭하고 뛰어난 사람으로 판단을 하고 정의를 내립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을 왕으로 삼고 싶어 합니다. 힘의 원리는 인간의 가능성과 인간 자체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인본주의 속의 힘의 원리이기 때문에 강력한 힘과 능력과 지혜, 그리고 수려한 외모를 힘과 가치로 여기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사울이라는 이름을 선호했던 것이고 바울의 부모 또한 바울이 그러한 자로 자라 주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사울이라는 이름을 주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자신의 열심과 노력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했습니다. 사울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내었던 것입니다.
(빌3:5-6) 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 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이게 바로 전형적인 사울들의 삶입니다. 자신의 힘과 지혜를 동원하여,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의 유익과 위상과 가치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가르치려 듭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아말렉 왕 아각과 살진 짐승들을 살려서 잡아 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그렇게 한 이유를 근사하고 장황하게 떠벌립니다. 전쟁법이나 인간의 도의에 의해서도 그렇게 다 진멸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살진 짐승들은 하나님 드리려고 가져 왔다는 것입니다. 어때요? 그의 말만 들으면 하나님이 무식하고 잔인하며 생각도 없는 분이 되고, 사울이 똑똑하고 현명하며 인정도 있는 사람이 되지요? 하나님은 그 사건으로 사울을 왕의 자리에서 폐위시켜 버립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 앞에서 순종하고 복종해야 하는 존재이지 자신의 힘과 지혜로 하나님의 뜻을 넘어서서 기특한 일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거인 사울 대신에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누구입니까? 다윗입니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아들 중 막내였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기름을 부으러 갔을 때 이새가 사무엘 앞으로 데리고 오지도 않았던 사람입니다. 너무 작았고 어렸으며 어디를 보아도 왕의 자격이 없는 자 같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에 형들이 참전을 했을 때 막내 다윗은 집에서 양을 치며 심부름이나 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다윗이 징병의 대상으로도 부적합했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형들 도시락을 가지고 전선에 갔다가 골리앗의 조롱을 듣고 그와 싸우러 나가겠다고 했을 때 사울이 자신의 갑옷을 다윗에게 입히지요? 그때 그 옷이 너무 커서 다윗은 갑옷도 못 입고 전투에 출전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세운 왕은 큰 사람이었고, 하나님이 세운 왕은 작은 자였던 것입니다. 성경이 그것을 극명하게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리앗이 자기와 싸우러 나온 다윗을 보자마자 뭐라고 합니까? ‘ 넌 아직 얼굴이 붉은 어린아이가 아니냐? 네가 나를 개 취급하느냐?’하고 조롱합니다. 그만큼 다윗은 전사로서의 면모도 갖추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다윗은 자신과 자신의 하나님을 조롱하는 골리앗에게 ‘난 내 하나님의 이름만 믿고 나간다’고 호통을 쳤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능력으로 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싸웠던 것입니다. 그게 신자의 올바른 자세인 것입니다. 작은 자 위에 하나님의 능력이 덮이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세상 누구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골리앗이 다윗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는 모양의, 연약하고 작은 다윗에게 성령이 임하여 대적이 멸망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이며 구속사 전체에서 보여 지는 성도의 존재 양식인 것입니다. ‘약함이 곧 강함이다’세상은 절대 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바로 이 전체의 내용이 ‘바울’이라는 이름 속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라는 이름은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원래 라틴어에서 기원한 단어인데 양이 적거나 수가 적을 때, 그리고 크기가 작을 때 쓰는 단어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인본주의의 총화라 할 수 있는 철저한 유대 주의자였습니다. 사울이었던 것입니다. 큰 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의 실체를 강조하여 폭로해 버리신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는 순간 그의 삶이 바울, 즉 작은 자의 삶으로 끌려 내려가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정상적인 성도의 삶입니다.
그가 자신의 자아인식을 어떻게 했나 보세요.
(갈1:13-14)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바울은 회심 이전에 하나님을 ‘지나치게’ 믿었다고 할 만큼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에 더욱 열심이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착하게 살았던지 자신은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서슴없이 말을 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세상의 큰 자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나요?
(고전15:8-9)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바울은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가리켜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합니다. 그가 조금 더 성숙한 사도가 되었을 때 그의 자아인식은 이렇게 변합니다.
(엡3:8)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성도 중에서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 이게 사도 바울의 자아인식이었습니다. 그건 괜히 겸손한 척하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예수의 은혜와 사랑을 알면 알수록 자신의 실체가 그렇게 자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말년에는 어떻게까지 변하는지 보세요.
(딤전1:15-16)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은 무슨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고 공로가 인정되어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죄인중의 괴수인데 하나님께서 자신 같은 자를 구원하신 것은, ‘이런 사람도 구원하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라는 메시지를 주시기 위해 자신 같은 자를 구원해 주신 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떠세요? 사도 바울의 자아인식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안 드세요? 사도는 하나님을 알아 가면 알 갈수록 자신이 작은 자이며, 티끌에 불과한 자라는 것을 깊이 절감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대단한 인물로 변해가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모든 서신의 첫 단어가 ‘파울로스, 작은 자(파울로스ΠαυλοςG3972)’인 것입니다. ‘난 지금까지 큰 자의 삶을 추구하며 내 자신의 힘과 지혜와 열심을 근거로 하나님 나라에 도달하려 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니 난 그분의 은혜, 그분의 십자가만을 굳게 붙들어야 하는 작은 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걸 깨닫는 것이 복음이다’
이러한 바울의 고백이 ‘파울로스’라는 단어 안에 전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는 자신이 작은 자임을 자각하고 '하나님처럼‘의 자리에서 내려와 피조물이 있어야 할 자리로 내려가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을 큰 자로 착각하고 있던 자가 작은 자로서의 자신의 실체를 올바로 자각하고 수긍하고 인정해가는 그 과정 속에 은혜의 왕 노릇이 실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 피조물은 크신 하나님 앞에서 작은 자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크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긍휼이 작음에 부어져 진짜 큰 자와 연합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끊임없이 큰 자의 삶을 추구해왔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큰 자 흉내를 내는 것은 하나님의 크심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러한 자들은 멸망에 처해져야 마땅한 것입니다.
구원이란 바로 그러한 인간의 큰 자에로의 추구를 박살내고 작은 자로 밀어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이야기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이 일관성 있게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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