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1 권한대, 파라칼레오
서울서머나교회
122-1. “ 권한대,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 “ 섬겨,둘류오δουλεύω”.... - 예수님의 비유(2).“아버지와 두 아들의 비유”본문기록...
100마리 양중의 하나, 열 드라크마 중의 하나, 두 아들 중의 하나, 이제 하나 중의 하나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큰 아들에 대해서 우리가 곡해하고 있는 것이 큰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은 나쁜 아들이라고 성급히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큰 아들 역시 우리 하나님 백성들의 패역한 현실을 보도하는 또 다른 모형인 것입니다.
큰 아들이 일차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이들은 이 비유의 서두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비유 또한 알레고리의 범주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이 비유 안에도 적당한 은유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큰 아들은 둘째 아들과는 사뭇 달라 보입니다. 둘째가 자기 몫을 다 가지고 나가서 허랑방탕하게 사는 동안 첫째는 아버지의 밭에 나아가 열심히 일을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를 지키며 살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일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보니 자기 집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슬며시 집안의 종을 불러 무슨 일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유산을 챙겨서 이방 나라에 가, 창기들과 함께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돌아온 자기 동생을 환영하는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듣습니다. 큰 아들이 화가 났습니다. 어떻게 자기처럼 성실한 사람에게도 한 번도 베풀어주지 않은 잔치를 그 돌에 맞아 죽어도 싼 자에게 먼저 베풀어 주냐는 것입니다.
큰 아들이 아버지께 노합니다.
(눅15:28-30) 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큰 아들이 노해서 집에 들어오지 않자,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맞이하실 때와 똑같이 또 문밖으로 나오십니다. 그리고는 그 아들에게 잔치자리로 들어오라고 권하십니다. 28절에 ‘권하다’라고 번역이 된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라는 단어는 보혜사 성령을 가리키는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ςG3875’와 뿌리가 같은 단어입니다. - ‘초청하다, 위로하다,중보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갑자기 여기에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G3870’라는 단어를 쓰심으로 -‘가까이서 부르다,기도하다’파라παράG3844;가까이,곁으로부터+칼레오καλέωG2564;부르다에서 유래
아버지가 큰 아들을 잔치자리로 초청하는 장면을 성령의 초청과 위로와 연결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둘째 같은 한량도, 첫째 같은 교만한 자도 다 품으시고 부르시고, 초청하시는 풍성한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예수께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자신에게 내재된 제한된 자원으로, 이 세상의 힘을 쌓아서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세상적 유토피아에 도달하려 할 때 나타나게 되는 현상이 어떠한 모양으로 나타나게 되는지 아세요? 첫 번째가 둘째 아들처럼 완전한 파산의 상태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하나님 없이 이 세상 것들로 참 만족과 참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늘 부족함에 시달리고, 늘 공허와 심심함에 안절부절 합니다. 그게 돼지우리 속의 탕자의 삶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여전히 자신의 힘을 부인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신뢰하며,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이들에게 종교심이라는 것이 가입을 하게 되면, 그게 위장된 성실이라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여전히 자기 자신이 삶의 중심입니다.
아버지의 영광이 자신의 영광이 되고, 아버지의 기쁨이 자신의 기쁨이 되는 그러한 하나님 자녀의 삶이 아닌, 자기 자신의 필요에 의해 아버지의 말을 들어주는 척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이 세상 속에서 자기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켜주는 절대자의 도움과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성실하게 행위라는 것들을 내어 놓습니다. 그토록 성실하게 아버지의 명을 좇아 열심히 살았던 큰 아들이 아버지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지 못하지요? 아버지는 기쁘신데 큰 아들의 입에서는 원망과 불평만 나옵니다.
왜 자기보다 남을 더 사랑하느냐는 것이지요.
그렇게 무언가 보상을 바라고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을 성경은 ‘종’이라고 부릅니다. 29절에 ‘섬겨’라는 단어가 나오지요? 그 단어가 ‘둘류오δουλεύωG1398’라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둘로스δουλοςG1401’라는 단어와 뿌리가 같은 단어로 ‘종으로 섬기다’라는 뜻입니다. - 데오δέωG1210;묵다,매다에서 유래
그러니까 큰 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열심히 아버지 말을 듣고 순종하고 있는 듯 보였지만, 거기에는 아들로서의 책임과 의무와 감사에서 격발된 성실이 아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한 종으로서의 위장된 성실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건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가진 어떤 것을 얻어내기 위한 포장된 악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드리지 못하고 아버지의 곁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허랑방탕하게 살았던 둘째와 아버지 곁에는 있었지만, 역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아버지의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며, 단지 아버지의 소유가 탐이 나서 열심을 부린 첫째와 뭐가 다릅니까? 큰 아들이 자기 동생을 환대하는 아버지께 화를 내며, 저렇게 재산을 탕진한 자에게 양이 웬 말이냐고 대들지요? 그 말은 자기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는 말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큰 아들은 속으로 작은 아들이 부러웠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유산 때문에 참은 것입니다. 뭐가 다릅니까? 둘 다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탕자인 것입니다. 오히려 둘째가 훨씬 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아요? 둘째는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종으로 살아도 아무런 할 말이 없는 그런 자식입니다.’하고 아버지를 찾아오는데, 첫째는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큰 아들입니다.’하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종처럼 살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더 나아요?
(요15:15)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보세요. 종은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도덕적 윤리적 선한 행위가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지 못했음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착하게 살던 큰 아들이 결국 마을 사람들과 가족들 앞에서 아버지를 심하게 모독을 했음을 간과하시면 안 됩니다. 둘째가 아버지 재산을 가지고 나가 전부 탕진을 한 일이나 큰 아들이 사람들 앞에서 잔치를 베푼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모욕하고 아버지께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는 것은 하늘의 관점에서 동일한 죄란 말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 진심으로 아버지의 소중함을 자각하여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그런 자녀들을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종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잃어버렸다 되찾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잃어버렸다는 것은 처음에 소유한 적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잃어버리지요.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창세전에 택함을 받고, 영원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완성이 된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잠시 이방 나라로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잃어버림을 자취하신 것입니다. 왜요? 우리 성도들에게 잃어버린 자들의 삶이 돼지우리 속에서의 쥐엄 열매 다툼과 같은 처절한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셔서 다시는 아버지를 떠나지 않게 하시려고 잃어버림을 자취하셨던 것입니다. 그 잃어버렸던 자들이 ‘하나님 아버지, 저는 아버지를 떠나면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고, 이렇게 처참하게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저는 아버지가 지금 당장이라도 지옥에 들어가라 하셔도 아무런 할 말이 없는 티끌 같은 존재입니다. 부디 저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하고 항복하고 돌아오는 것이 이 역사와 우주가 존재하는 목적인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종의 자리도 감지덕지 한 자입니다.’라는 겸손의 고백이 우리 안에서 진심으로 터져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걸 배우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티끌 됨이나, 종 됨을 자각하는 것 이전에 우리의 열심과 노력으로 뭔가 업적을 쌓아서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려는 왜곡된 성실을 내어놓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 또한 자기중심의 자아 숭배 교에서 벗어나지 못한 악한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나오는 성실한 행위가 진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에서 나오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 잘 보여서 뭔가 떡고물을 챙기려 하는 위장된 성실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 아세요?
여러분이 행한 그 일을 아무도 안 알아주었을 때 여러분 마음이 어땠는지 생각해 보세요? 섭섭하셨습니까? 괜한 헛수고 했다는 생각 안 드셨어요? 그게 큰 아들입니다. 작은 아들보다 더 나쁜 큰 아들이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근사한 종교행위나 성실한 구제나 봉사, 힘에 지나는 헌금, 건강을 해칠 만큼의 기도생활, 이런 것들에 감격을 하고 감탄을 한단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이 큰 아들의 모습, 종의 삶일 수 있다는 것을 절대 간과 하지 마세요.
아버지의 것으로 허랑방탕하게 창기들과 놀아난 둘째를 오늘 날 도덕과 윤리로 평가를 하면 어떤 평가가 나옵니까? 죽일 놈입니다. 반대로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의 밭에서, 아버지의 일을 도와 죽도록 일한 큰 아들은 오늘 날 도덕과 윤리로 평가할 때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효자 상이라도 주어야지요.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 놓은 도덕과 윤리는 그 두 아들을 그렇게 극명하게 대척점으로 몰아 완전히 반대의 평가를 내릴지 몰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둘 다 죽일 놈이면서, 둘 다 구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어떠세요? 이 시점에서 우리의 삶을 한 번 돌아보자고요. 우리의 삶은 정확하게 둘째 아들과 큰 아들의 삶이 적절하게 섞여 있는 형국 아닌가요? 그렇다면 우리는 도저히 불가능 한 존재 들 입니까? 여러분이 잊지 마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결론이 없다는 것입니다.
(눅15:31-32)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큰 아들이 아버지가 베풀어 놓은 그 잔치에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 비유의 결론이 독자에게 넘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세요. 이 누가복음 15장은 전체가 다 잃었다가 찾아진 존재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결론에서 큰 아들만 버려진다면 이야기의 일관성이 없잖아요? 게다가 아버지는 28절에서 성령의 초청을 연상시키는 ‘파라칼레오’라는 단어를 써서 큰 아들을 잔치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악한 큰 아들이 하나님의 잔치로 초청을 받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백에서 십으로, 십에서 둘로, 둘에서 하나로, 결국 그 하나도 하나님의 은혜와 열심 앞에서는 하나님의 잔치 집으로 돌아 올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예수님은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그 비유의 청자들, 사마리아의 세리들, 창기들, 죄인들, 예수님의 제자들, 유대의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그들 모두는 아버지를 버리고 뛰쳐나간 둘째 아들이요, 아버지에게 노하여 자기 동생을 ‘당신의 아들’이라고 부르며 자기에게 보상을 해 주지 않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큰 아들인 것입니다. ‘너희들 모두에게 구원의 길은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는 그 만큼 큰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큰 은혜 앞에서 지금 누가 누구를 가리켜 죄인이라 하고, 창녀라 부르고, 세리라 얕보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하면 전부 죽은 흙에 불과한 자들입니다. 우리의 성숙이나, 우리 안에서 나오는 모든 선한 행위도 전부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누구도 다른 누구를 정죄하거나 판단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첫 번째 잃은 양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시지요?
(눅15: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하나님은 회개할 것 없는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더 기뻐하신답니다. 그 말은 이미 회개한 사람들보다 나중에 회개하고 돌아 온 사람이 더 가치가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서기관들처럼, 유대주의와 헛된 종교적 열심에 빠져 있는 사람들처럼, 마치 자신들은 회개할 것이 없는 자로 여기고 다른 이들의 잘못이나 흠을 찾아내고 정죄하는 데에 힘을 쓰는 이들은 절대 하나님의 기쁨의 잔치 자리에 못 들어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6절을 보면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와서 이웃과 가족들을 초청 해다가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양 한 마리 찾았다고 다른 양들을 잡아 잔치를 벌이는 게 이해가 가세요? 이렇게 찾아진 양과 잡혀 죽는 양이 구분이 되어 있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게 소중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잃었다 찾은 양이십니까? 아니면 찾은 양의 잔치에 쓰일 소품용 양입니까?
이렇게 가장 악한 큰 아들까지도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을 입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진짜 큰 아들이 창기와 함께 아버지의 것을 허비하고 있는 동생들을 찾아서 이 땅에 내려와 그들의 삶의 실체를 바로 보게 하시고, 돌에 맞아 죽어야 할 그들의 죽음을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 그들을 아버지께로 돌려보내시는 하늘의 장자 역할을 잘 해내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성도의 교회를 가리켜 ‘장자들의 총회’라 부릅니다. 우리는 어떤 장자가 되어야 합니까? 다른 이들이 나보다 더 칭찬을 받고, 나보다 더 인기가 있고, 나보다 더 우대를 받는 것이 화가 나고, 분이 나서 분열과 다툼을 초래하여, 아버지를 가슴 아프게 하는 장자이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길을 잃고 연약한 상태로 돼지우리에 머물고 있는 내 형제가 안쓰러워 그 형제들을 위해 내가 도리어 낮아지고, 내가 도리어 그들의 발을 씻기며, 내가 도리어 그들을 위해 죽을 준비를 하는 진짜 장자들이 되어야겠습니까?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병원에는 의원병(iatrogenic)이라는 것이 있지요? 헬라어로 의사를 가리키는 ‘이아트로스ίατροςG2395’라는 단어에 - 이아오마이ίάομαιG2390;치유하다,온전케하다. 참조; 라파רפאH7495-고치다,치료하다,의사,온전케하다... 원인이라는 뜻이 ‘genic’이 붙어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지병을 치료하러 갔다가 치료과정 중에 더 심한 병에 걸리는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경건과 성숙을 지향하는 교회에는 경건 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걸 자기 의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까지 잔치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이 중에도 경건 병에 걸리신 분들이 꽤 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어서 어서 말씀으로 치료 받으시고 오직 아버지의 은혜 앞에 납작 엎드리시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자리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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