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히브리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개념
144. “히브리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개념 ”....
- 그런기독교는 없습니다. (41강) 교회와 복음...본문기록
(창12:1-3)
1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3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설교는 구사되는 단어가 다르고 전개되는 내용은 다를지라도 모두가 한 곳으로 수렴되어야 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라는 복음으로 결론이 나야 합니다.
서머나 교회가 개척되고 제가 많은 설교를 했지만 그 모든 설교는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것들이었습니다.
제가 몇 차례 복음의 개요를 이러저러한 각도에서 설교를 했습니다만
오늘은 조금 더 자세히 히브리 문화와 언어, 사상, 그리고 관습 등을 살피면서
여러분들에게 정확하게 개념 정리를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생명, 삶, 죽음, 복, 의” 이런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들을 좀 더 실제적이고
실존적인 관점으로 정의를 내려 드리겠습니다.
제가 최대한 쉽게 설명을 하려고 노력을 하겠습니다. 그래도 조금 힘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처음에는 조금 이해하시기 힘드시더라도 여러 번 들으시고 완전히 이해하실 때까지 열심히 공부하세요.
우리가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히브리 사람들의 언어와 사상 그리고 문화와 습관, 그들의 배경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먼저 히브리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개념을 우리가 살피고 넘어가겠습니다.
성경에는 ““살았다”” 혹은 ““죽었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어있었다”“우리는 예수 안에서 다시 살았다”그렇게 얘기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개념은 우리의 것과 조금 다릅니다.
이러한 히브리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관한 개념을 먼저 알아야 성경이 이야기하는 복음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2:7) 주 하나님이 땅(히, 아다마אךמהH127)의 흙으로 사람(히,아담אךםH120)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지으신 존재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쓰인 생기라는 단어는 (네솨마נשׁמהH5397)인데 여러분이 잘 아시는 “(루아흐רוּח)”와 같은 말입니다.
생기를 불어넣었더니 그 존재가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생령이 되었다““는 말을
히브리 원어로 보면“ (하이חיH2416)(네페쉬נפשׁH5315)(하야היהH1961)”입니다.
/(하이חי)는 ““살아있는””의 뜻이고(네페쉬נפשׁH5315) (하야היה)는 being "존재““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는 생령이 되었다 는 말이 became living being라고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헬라 문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알렉산더의 팍스 로마나가 이 시대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헬라의 이원론으로 많은 사고를 합니다. 그것은 히브리 사상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데 조금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헬라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티끌로(흙으로)(아파르) 사람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living 네페쉬가 되기 전의 네페쉬를 만들어 놓으신 거죠.
그 사람은 그냥 인형에 불과했습니다. 눈동자도안 움직이고 그냥 마네킹 같은 것이었는데 거기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그 존재가 살아서 말도하고 피도 통하고 그렇게 된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이 쓰는 이 ““(네페쉬נפשׁ)””라는 말의 의미는 그런 움직이지 않는 인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쓰는 이 ”(네페쉬נפשׁ) “존재”라는 이 말의 개념은
육신과 정신, 성품, 인격 등 사람이 사람이기 위해 필요한 모든 영적, 육 적 요소를 다 포함해서
(네페쉬נפשׁ)(존재)라 이야기 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어떤 사람의 사람됨을 판단할 때 무엇을 근거로 합니까? ““신언서판””이라고 하지요.
그 사람의 신수(육신)과 언변, 그 사람의 글과판단력 이 모든 것은 그 사람의 성품과 인격을 나타내지요.
그 것이 그 존재를 특징짓는 요소들이라고요.
그러니까 김성수가 김성수이기 위한모든 외양, 성품, 인격, 의식, 무의식 모두를 가리켜 “(네페쉬נפשׁ)”“존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 “(네페쉬נפשׁ)”라는 단어를
우리가 종종 spirit이라고 번역하는 “(루아흐רוּחH7307)”라는 단어와
heart라고 번역하는 “(레브 לב/H3820)”라는 말과 혼용해서 씁니다.
((네페쉬נפשׁ),(루아흐רוּח),(레브 לב))라는 단어들을 히브리 사람들은 생명, 생기, 호흡, 영혼, 기운, 존재 이런 뜻으로
혼용을 해서씁니다. 그렇다고 그 말들이 정확히 동의어는 아닙니다.
좀 더 정확히 그 단어들의 뜻을 보면
““(루아흐רוּח)”” spirit은 ““(네페쉬נפשׁ), 존재””가 어떤 일을 수행할 때 그 일을 수행하는 힘,
즉 operation power을 말합니다.
그리고 히브리 말 “(레브 לב), heart”는 (네페쉬נפשׁ)가 어떤 것을 기획하고 의도하고 계획하는
역할을 합니다. (네페쉬נפשׁ)는 (루아흐רוּח)나 (레브 לב)를 다 포함한 전체 존재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기능적인 면에서 조금 다릅니다.
그런데 (네페쉬נפשׁ), (루아흐רוּח), (레브 לב)가 혼용되어 쓰입니다.
생명, 생기, 호흡, 영혼, 기운, 존재 이렇게 같이 쓰인다고 했습니다.
조금 이해하기 편하게 제가 설명을 해 드리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세 분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각기 다른 기능으로 일을하셨습니다.
성부하나님께서는 계획을 하셨고 성자 하나님은 실행에 옮기셨고 성령하나님께서는 적용을 해 나가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분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으로 대표됩니다. 그러나 기능이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예수님””으로도 불립니다. 그 하나님은 ““성령님””으로도 불립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존재에 대한 개념이 이런 것입니다.
““존재””는 (네페쉬נפשׁ) 라고 불리지만
그 (네페쉬נפשׁ)는 spirit, heart를 포함하고 대표하는 단어입니다.
그 (네페쉬נפשׁ)는 (루아흐רוּח)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그 (네페쉬נפשׁ)는 레브(레브 לב)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존재” 하면 “(네페쉬נפשׁ)”라고 대표하여 부르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네페쉬(네페쉬נפשׁ), 존재”는 육신과 영혼, 정신 spirit, 생각 (레브 לב)
모든 것이 포함 된 종합 적인 것입니다.
이런 사상 때문에 그들에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념이 쉽게 이해가 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기노스코γινώσκωG1097,안다””라고 하면
그냥 피상적으로 어떤 대상을 조금 안다는 정도가 아니라 부부 관계처럼 그 대상을 완전히 이해하고 자기
(네페쉬נפשׁ) 속으로 끌어들인 것을 ““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깊은 우정과 사랑의 관계를 ““안다””고 합니다.
육체와 영혼과 생각을 따로 떨어뜨려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료실 127번 참조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G2588) 생각(G1761)과 뜻(G1771)을 감찰하나니(G2924)
* 참고)1.마음의(카르디아καρδίαG2588)
- 호(ὁ) 프뉴마(G4151 πνευμα) = 말씀.진리.성령.
-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로 아가페(사랑)으로 가진자
= 카르디아(G2588καρδία)(심장)을 가진자가 됨
- 요한계시록에서 우리의 이름을 말씀이라 하심.
- 심령이 가난한자, 진리.말씀에 갈급한자=프토코스(πτωχόςG4434)
- 하나님의 사랑 마음을 내안에 진리로 갖고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을 용서,연합이라고 함.
2.생각(엔뒤메시스 ένθύμησιςG1761-숙고,고안,생각..)
- 엔뒤메오마이(ένθυμέομαιG1760)에서 유래-영감을 받다,생각하다..to bring in mind
;엔(ένG1772~안에)+뒤모스(θυμόςG2372-욕정,격노,분노...)에서 유래
(뒤모스θυμόςG2372는 뒤오θύωG2380에서 유래)
달려들다,제사드리다,희생하다,살해하다,죽이다,제물을 드리다...
3.뜻(엔노이아ἔννοιαG1771)-생각이 깊음,이해,의도.act of thinking
;엔(ένG1772~안에)+누스(νουςG3563-지능,마음...) 의 합성어에서 유래
(누스(νουςG3563-지능,마음...)는 기노스코γινώσκωG1097어간에서 유래.
허락하다,알게하다,인식하다,말 할 수 있다,확신하다,이해하다
4.감찰하시고(크리티코스κριτικόςG2924-결정하는,구별하는,식별하는..)
;크리테스κριτήςG2923-재판관에서 유래
(크리테스κριτήςG2923는 크리노κρίνωG2919에서 유래)
구별하다,결정하다,언도하다,정죄하다,판결하다,판단하다,선고하다...등
“묵상을 한다.”는 개념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묵상””하면 ““단순히 눈으로 보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시편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고 나와 있지요?
그것을 우리는 단순히 성경을 깊이 읽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묵상을 한다고 하는 것은 그냥 눈으로 보고 생각하는 것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적용하고 실천하는 것까지를 모두 포함한 것을 “묵상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네페쉬נפשׁ)” “존재”는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육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헬라어 이원론은 육신,생각,영혼이 다르다고 합니다.
서구 사상은 무의식 상태에서 죄를 지은 것은 죄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무의식 상태에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입증만 되면
형량이 조금 가벼워집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은 생각이 다릅니다.
의식이건 무의식이건 그것은 모두 (네페쉬נפשׁ), 존재 의 것이기 때문에 그 존재가 책임을 지어야 합니다.
그들은 생각과 행동을 따로 떨어뜨려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을 했으면 이미 그 (네페쉬נפשׁ)는 그 존재가 생각을 한 바로 그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것이 이미 간음한 것”” 이라고 말씀 하셨을 때
그들은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네페쉬 , 존재는 그냥 죽어있는 인형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하이חי)(네페쉬נפשׁ)(하야היה)””““living being"이 되기 전에
그냥 인형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보고 말하고 생각하고 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도 하나님께서 하늘의 새와 물고기를 창조하시는데
그들을 가리켜서도 “(네페쉬נפשׁ)”라는 단어를 씁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셨나요?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늘을 날고 물에서 헤엄을 쳤습니다.
인간도 역시 그렇게 존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셨더니
그 존재가 ““(하이חי)(네페쉬נפשׁ)””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보고 말하고 생각하고 있다고 해서 그 것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되지요?
히브리 사상에 의하면...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었다는 개념은 이러합니다.
이 존재““(네페쉬נפשׁ)””가 존재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그러니까 건강, 지식, 지혜, 인격, 성품 등등)
그 모든 것을 그들은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존재가 그 생명력을 100% 소유하고 있는 상태를
““happiness"(행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그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창조되었을 때에생기가 불어 넣어져서
인간이 하이 네페쉬 하야(living being)생령이 되었습니다. 100%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상태가 행복한 상태였습니다.
비록 죄를 지을 가능성은 있었지만 죄를 짓기 전에는 100%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질병과 고난과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인간에게 질병과 다툼, 고난 등이 닥치게 되면 인간은 아프고 고통스럽고 슬픕니다.
100%의 만족한 생명력을 소유하지 못하게 됩니다. 부족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죄인으로 나기 때문에 질병과 고통과 사망에 노출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늘 뭔가가 부족합니다. 가슴 한 구석이 뻥 뚫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돈도 벌고 공부도 하고 일도 하고 사랑도 합니다.
그러나 그 부족은 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죄가 해결되지 않으면
절대 그 구멍은 메워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육신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고 늙어가면서 생명력은 점점 줄어들지요?
힘도 빠지고 외모도 늙어갑니다.
결국에는 모든 생명력을 쏟아 내어버린 시체가 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죽음을 향해 생명력이 조금씩, 조금씩 소진되는
그 죽음을 향한 전체의 과정을 “죽었다”라고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길갈에서 할례를 행합니다.
남자들이 고통스러워합니다. 여호수아5장8절에 ““그들이 낫기를 기다리매””
거기서 쓰인 단어가 역시 “(하야היה)”입니다. 그들이 ““살아나기를 기다리매”” 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히브리 사람들은 생명력이 꽉 차 있지 않고 죽음으로 향해 가는 모든과정에 있는 사람을
““죽은 자””혹은 ““약한 자”” ““병든 자””-동의어로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죄의삯으로 ““사망””이라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죽게 되어있습니다. 누구도 그 죽음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 죽음을 향해 하루하루 늙어가고 생명력을 소진해 가고 있는 자들을 가리켜 히브리 사람들은
““죽은 자””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죄인들을 가리켜 ““죄와 허물로 죽은 자””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약해졌던 생명력이 다시 회복되어 지면서 100%의 만족, happiness로 향해 가는 길을
““살았다””라고 합니다. 모두가 죽어야 하는데 어떤 한 무리가 그 죽음의 길에서 돌이켜 살아났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이 지구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죽어 가는 자, 죽은 자““들과 ””살아난 자““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마치 대구역에 있는 우동 집에서 우동을 먹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같은 모양을 하고 같은 행위를
하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부산으로 내려가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서울로 올라가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죽어가고 있고 어떤 사람은 살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죽어 가고 있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살아나고 있는 악당이 존재 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살아난 자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