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목사님

153. 근신“소프로니 스모스σωφρονισμός교양,징계“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jaeim1028 2015. 11. 29. 16:12

153. 근신“소프로니 스모스σωφρονισμός”,

          교양,징계“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훈계“누데시아νουθεσία”...

               - 에베소서75 자녀들아, 부모들아...본문기록

(엡6:4)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부모들은 자녀들을 노엽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잠언에 보면 사뭇 다른 내용이 나옵니다.

(잠13:24)

24 매를 아끼는 것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은 훈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잠22:15)

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22:13-14)

13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14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한 쪽에서는 죽지 않을 만큼 패라고 하시고 한 쪽에서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늘날 세계 교육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미국식 교육과 유럽식 교육, 특히 영국식 교육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전 세계가 미국식 교육 방법으로 흘러가고 있지만 빅토리아 여왕 때까지만 해도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교육은

엄격하기 그지없는 교육이었습니다.

챨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나 샬로트 브론테의 제인 에어 같은 소설을 보면

당시 영국 학교가 얼마나 엄하게 학생들을 가르쳤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체벌을 거의 해병대 훈련소만큼 하는 것 같더라고요. 아이들은 의무적으로 구구단을 외워야 했고

기계적으로 알파벳을 암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 구절을 암송해야 했습니다.

만일 선생님의 요구 수준에 미달 된 학생들은 가차 없이 처벌을 받았습니다. 작은 의자에 올라가서 몇 시간이고 서 있어야 하고, 밥도 안 줍니다. 제인 에어에서는 제인 에어의 친구가 비오는 날 제인 에어하고 같이 벌을 받다가 폐렴에 걸려서 죽지요)

영국에서는 그러한 교육 방식을 가리켜 3R 교육방식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권위적인 교육 방식이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그 때 혜성처럼 등장한 사람이 마리아 몬테소리라는 여자였습니다.

마리아 몬테소리 박사는 그 때까지의 권위적이며 주입식인 교육 방식에서 벗어나 피교육자가 교육의 내용과 결론을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방법을 교육에 도입했습니다. 그래서 체벌보다는 설득을, 명령보다는 이해를 시켜서 학생들이 자발 적으로

공부를 할 수 있게 하자는 것바로 몬테소리 교육법입니다.

이 교육방법은 피아제나 프로이트 같은 심리학자들의 심리학 이론의 지지를 얻어서 전 세계의 교육을 삽시간에 흔들어 버렸습니다. 학교에서 체벌이 없어졌고 강압적인 명령이 없어졌습니다.

심지어 아이들이 잘 못을 저지르면 ““다 잘 못 가르친 내 탓이다””라며 선생님이 스스로 밥을 굶는 다든지 체벌을 받는 일이 미담으로 전해지곤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게 cashier 들이 더하기 빼기를 잘 못합니다.

돈 한번 거슬러 주는데 하 세월입니다. 25불짜리 물건을 사고 100불을 내면 26부터 세기 시작해서 100까지 셉니다.

대학생들이 맞춤법을 잘 모릅니다.

이 교육방법은 이론으로는 손색이 없는 교육 방식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놓친 게 있습니다.

이 이론은 인간 본성은 본질 적으로 선하고 인간은 스스로 선을 찾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서만 가능한 이론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인간은 그렇게 자발적으로 선을 추구하는 존재가

못 됩니다. 선생님이 자기 대신 체벌을 받으면 선생님의 은혜에 감읍해서 ““다시는 그런 잘 못을 안 저지르리라

““ 다짐하는 그런 장면은 영화에서나 나오지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좀 체로 볼 수 없는 장면입니다.

체벌을 가하지 않고 아이들의 양심에 호소하여 그들의 잠재되어 있는 선을 부추겨 주면 아이들이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사람들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은 점점 버릇이 없어집니다. 어른들을 봐도 인사 제대로 하는 녀석들이 별로 없습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 교회의 어떤 집사님께서 진짜로 아이들이 잘 못을 저지르면 아이들을 체벌하는 대신 자기가 저녁밥을 굶는 벌을 받았답니다. ““다 아빠 잘못이야”” 어떤 결과가 있었을까요? 그러다 굶어 죽을 뻔했답니다.

아이들은 절대 아버지를 동정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달콤한 죄를 끊어버릴 실력이 없습니다.

성경은 그 때 ““아이들에게 채찍을 들어라““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왜요? 바로 우리 하나님께서 죄를 보실 때

그렇게 채찍을 드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히12:5-8)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하나님은 자녀들의 죄를 보시면 채찍으로 징계하셔서라도 바로 고쳐 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육신의 부모들도 아이들에게 채찍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 보시면 더 명확하게 확인이 됩니다.

(히12:9-11)

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육체의 아버지들도 자녀를 징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육체의 아버지의 징계 속에서 그 분을 공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리고 그 징계는 즐거운 것이 아니고 슬픈 것이지만 그 징계를 통과한 자만이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들은 자녀들을 징계하며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징계에 꼭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 ““자녀들을 노엽게 만들지 않는 징계””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고도 이 비슷한 명령이 골로새서에도 나옵니다.

(골3:21)

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이 말은 절대 아이들을 체벌하지 말라는 구절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이들이 잘 못했을 때 아빠에게 매를 맞으면 그 아이들이 전부 격노합니까?

여러분 어려서 아빠에게 매 맞으면 격노하셨습니까? 이 말씀은 아이들을 체벌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아이들을 감정 적으로 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체벌과 징계에는 절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딤후1:7)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능력을 주셨는데

    그 능력은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으로 자제되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근신””이라고 번역이 된

    “소프로니 스모스σωφρονισμόςG4995”““훈련되어, 절제되고 자제된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솝흐로니조σωφρονίζωG4994에서 유래(건전한 마음을 만들다,교정,훈련하다..)

                                -솝흐론σώφρωνG4998에서 유래(자제를,분별력있는,근신하는...)

             소조σώζωG4982(구원하다,완전하게만들다..)+프흐렌φρήνG5424(자갈을 먹이다,고삐를 매다,감정,정신,지혜..

 

 --프흐렌φρήν관련설교말씀.(로마서 84.육신의 생각으로 죽어야 영의 생각으로 산다)

모든 인간이 이 세상에 나올 때 비 진리의 영역 속의 비 진리적 존재로 옵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바꾸어 보면 ‘죄악 된 세상 속에 죄인’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세상에는 의도 없고 의인도 없어요.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교보재로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은 죄와 악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 세상을 꽉 채우고 있는 죄와 악을 사용하셔서 하늘의 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은 죄와 악을 통하여 당신 백성들의 육을 죽이시고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아 안 자들에게 생명을 부으시어 평안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 6절의 내용입니다.

바울은 6절에서 육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합니다.

이걸 단순히 육과 영의 대조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성도는 이 육과 사망, 영과 생명을 과정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생각’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프흐로네마φρόνημαG5427' 경향’이라는 뜻이라고 했지요?

그 단어를 추적해 올라가면 ‘프흐렌φρήνG5424, ‘프흐랏소φράσσωG5420-울타리를 치다,애워싸다’

까지 올라가게 되는데 그 단어들은 ‘고삐에 묶이다, 울타리 안에 갇히다’라는 뜻과

‘그렇게 정해져 빠져나갈 수 없는 고정된 지혜, 굳어진 생각과 경향’이라는 뜻으로 이어집니다.

육의 생각, 즉 육의 경향(프흐로네마)은 인간이 빠져나가거나 경로변경을 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육의 경향은 반드시 결정된 목적지로 그 존재를 이끌고 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지가 사망입니다. 그 사망이라는 단어가 ‘다나토스θάνατοςG2288’라 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그 ‘다나토스’의 죽음은 좋은 죽음이라 했지요?

그러나 그 ‘다나토스’의 죽음에 머물러 버리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이 영원한 ‘네크로스’의 죽음으로 들어가게 되는 불신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이 7절이 말하는 하나님의 원수들입니다.

성도가 그렇게 육의 경향에 의해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게 되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면

그 성도를 ‘영’이라 부릅니다.

바울도 로마서 1장 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성결의 영으로 부활하신 분으로 진술을 하지요?

부활은 육신을 갖고 부활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성결의 영(프뉴마 하기오쉬네)으로 부활을 하셨다고 해요.)).....로마서 말씀중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감정을 자제하고 절제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그 단어 안에는 ““훈련””이라는 의미가 함께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훈련하셔야 합니다. 참는 연습을 하셔야 합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부모들이 자녀들을 징계하거나 체벌할 때에 자제되지 못한 흥분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징계하거나 체벌을 하게 되면 자녀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자녀를 격노케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저지른 잘 못에 대한 해명이나 이유를 들으려 하지도 않고 흥분해서 손부터 올라간다든지

때리다 보니까 더 흥분해서 작은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체벌을 가한다든지 하면

아이들이 힘이 없어 맞고는 있지만 그 마음속에 노를 쌓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제하는 마음이 없이 흥분한 상태로 자녀를 징계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징계의 일관성이

없어지게 됩니다.

똑같은 잘 못을 저질렀는데도 엄마가 기분 좋은 날은 벌을 안 받고 엄마가 기분 나쁜 날은

엄청 두들겨 맞고 그러면 아이들에게 불안감이 쌓이게 되고 그들의 행실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기능을 상실해 버리게 됩니다.

어떤 날은 이 일이 굉장히 큰 잘 못인 것 같았는데 어떤 날은 웃으면서 넘어가기도 하고

그러면 아이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 일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녀를 징계할 때는 일관성을 가지고 변덕스럽지 않은 징계를 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를 징계할 때는 반드시 합리적인 방법으로 징계를 하셔야 합니다.

흥분을 해서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면 그 잘못에 대한 아이들의 설명도 듣기 전에 자칫 억울한 누명을 씌우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흥분해서 아이를 징계하기 전에 자녀가 자신의 잘 못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전에 우리 첫째 녀석과 둘째 녀석이 유년 부 방에 있는 휴지통에다가 오줌을 싼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둘째 녀석을 제 사무실로 데리고 가서 ““엎드려 뻗쳐””를 시켜놓고 엉덩이를

몇 대 때려 줬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아이가 이야기하기를 제가 예배에 들어가고 나서 자기들끼리 유년 부 방에서 게임을

하면서 놀고 있는데 너무 소변이 마려워서 아래 층 남자 화장실로 내려갔더니 카페 문이 잠겨 있더랍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다른 화장실을 찾을 수 없어서 형이랑 trash can에다가 소변을 보았대요. 그런데 조금 있다가 이번에는 다시 대변이 마려워서 휴지를 깔고 대변을 보고 그걸 trash can에다가 넣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 엄마가 옆에 있다가 ““그럼 엄마한테 와서 화장실 문을 열어 달라고 해야지 왜 휴지통에다가 오줌을 싸냐고””하니까 ““엄마가 예배 때는 절대 예배당에 들어오지 말라고 해서 못 들어갔다””고 하면서 막 울더라고요.

제가 아이한테 정중하게 사과했습니다.

아빠가 사정도 물어보지 않고 무조건 엉덩이를 때려서 미안하다고.

이렇게 부모가 자기 분에 못 이겨서 합리성과 자제력을 잃어버리고 아이들에게 매를 대게 되면

아이들은 적대감정과 분노를 무의식 속에 쌓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 아이들이 ““나는 무시당하고 있다““거나 ””나는 부모님 앞에서 완전히 굴욕을 당하고

있다““거나””나는 사람 앞에서 창피를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벌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게 ““아이들을 노하게 하지 말라””는 구절의 뜻입니다.

그리고 아울러서 그 근신과 함께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이 뭐였지요? ““사랑””이렀습니다.

징계에는 그 근신과 함께 ““사랑””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벌을 받으면서도 ““우리 부모가 나의 잘못 때문에 많이 슬퍼하고 있구나, 정말 미안하다””는

마음이 들게끔 사랑을 수반한 징계를 가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우리의 장난감도 아니고 우리의 물건도 아닙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하나님의 자녀 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걸 늘 놓칩니다.

하나님께서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시험의 내용 중에 중요한 한 국면이

“내 자식 이삭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께 보여 준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모리아(מריהH4179)”라는 단어의 의미가 ““보여주다””라는 뜻입니다. )

우리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그 자녀를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내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내 자식을 비롯한 나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은 우리가 바로 그와 동일한 고백을 해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 자녀는 ““내 소유””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 자녀가 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그 자녀에게 집착하게 되고 우리의 감정을 절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녀를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대신 이루어 주는 대리 만족의 수단으로

밖에 쓸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는 우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잠시 맡겨 주신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최선을 다해 그 진짜 아버지가 원하시는 대로 양육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 진짜 아버지가 그 자녀를 어떻게 키워 주기를 원하십니까?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엡6:4)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여기서 ““교양””““파이데이아””는 히브리서12장에 나오는 ““징계””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교양”““파이데이아παιδείαG3809”라는 것은

아이를 사람답게 만들기 위해 가하는 징계를 포함한 모든 교육을 말하는 것이고

““훈계””““누데시아νουθεσίαG3559””는 말과 행동으로 자녀에게 경고하고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교양과 훈계가 ““주의 교양과 훈계입니다”” 바로 말씀으로 아이들을 양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6:4-9)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 자녀들을 말씀으로 가르치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을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고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 하십니다.

그 말씀은 자녀들에게 말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손목에 매고’ (어떤 일을 행할 때도 주의 말씀에 입각해서 행하라)

‘미간에 붙이고’ (생각하고 사고하는 것도 주의 말씀에 입각해서 하라)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

(집안에서나 집을 나설 때, 그리고 밖에서 집으로 돌아 올 때 항상 그 말씀대로 행하며 살아야 하는 것을 가슴 깊이 새기라) 는 것입니다.

그렇게 먼저 아이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고 말씀으로 훈계를 할 때 아이들은 격노하지 않고 징계를 달게 받게 되며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 자녀에게 세상의 힘을 더 소중한 것으로 가르치십니까?

아니면 우리 하나님을 더 중요하게 가르치십니까?

아이들이 학교에 하루 안 가면 난리를 치면서 교회에 안 가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시지는

않으십니까?

제가 대학교 때 중등부 교사를 했었는데 가끔 아이들이 안 올 때가 있습니다. 그 때 그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면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 아이가 교회 가기 싫대요.””““중간고사 시험이에요”” ““아빠 생신이어서...””

그건 부모가 은연중에 아이들에게 신앙생활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신앙 안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아이로 만들어야지,

세상의 힘을, 돈을 두려워하는 아이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나1:2-6)

2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3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 발의 티끌이로다

4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우시며 모든 강을 말리우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이우는도다

5 그로 인하여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의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이

    솟아 오르는도다

6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도다

 

왜 성경이 이렇게 간혹 하나님을 두려운 공포의 대상으로 그리고 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크시며 그 분이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신 지를 절대 잊지 말라는 경고인 것입니다.

자녀들을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자들로 키워 내십시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본인이 아이들의 힘과 방패막이가 되어주려 하지 마십시오.

과잉보호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 말씀에 근거하여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설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서 독립적인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셔야 합니다.

그 아이의 무덤까지 따라가서 그 아이의 뒷수발을 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런 아이들이 결혼해서 꼭 문제를 일으킵니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서도 엄마의 보호 속에 있고 싶어 합니다.

심지어 외식을 해도 식당 하나 자기가 선택하지 못하고 엄마한테 물어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거 정말 잘 못 키운 자녀입니다. 어느 순간이 되면 그 아이가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게 해 주시고

자기가 잘 못 판단한 것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지게 만들어 주셔야 합니다.

자식은 자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특히 시어머니들 아들하고 며느리 사이에서 주무시는 분들도 계시다고 하시는데

이제 그만 그 아들을 떠나보내십시오.집착하지 마세요.

 

지금까지 우리는 남편과 아내, 그리고 부모와 자식들이 어떻게 성령 충만한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명심하실 것이 있습니다.

이 성경 본문이 이야기하는 것이 이렇게 성경 말씀대로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목술 걸고 사랑해 주고,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를 노하게 하지 않으면서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게 되면 정말 행복한 가정이 될 것이다““ 가 아닙니다.

“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면 언젠가 남편이 감동을 하게 되고 그 남편도 나처럼 예수를 잘 믿게 될 것이다““””내가 내 아내를 목숨 걸고 사랑해 주면 자기도 사람인데 언젠가는 변하겠지““라는 것은 기계적이며 수리적인 결과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해서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더니 거기 있는 사람들이 돌을 내려놓고

스데반이 믿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듯이

여러분이 최선을 다해 순종하고 사랑하고 양육했는데도 전혀 변함없이 계속 여러분을 고통스럽게 하는 가족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 순종하고 사랑하고 양육해야 하는가? 네, 맞습니다.

우리는 그래도 하나님께서 하라는 대로 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순종하고 사랑하고 양육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나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순종하고 사랑하고 양육하면서 우리의 거룩을 다듬어 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 가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열심히 여러분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열심히 충실하게 수행해 나가도록 하십시오.

 

목사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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