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목사님
160. 케리그마(Kerygma).디다케(Didache).보이셨다(옵타노마이όπτάνομαι
jaeim1028
2015. 11. 29. 16:34
160. 케리그마(Kerygma).디다케(Didache).보이셨다(옵타노마이όπτάνομαι)... - 로마서(62) 십자가와 부활의 케리그마 본문기록... (롬6:5-11)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8.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9.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 이로라 10.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지어다 ‘케리그마(Kerygma)’라는 것은 공적인 사자가 어떤 확정된 소식을 공중 앞에서 외쳐 선포하는 일이나 그 선포된 내용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가 기독교 용어로 쓰이게 되면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나 그 선포된 복음의 내용을 의미하는 단어가 됩니다. 그 단어는 믿는 자들의 생활과 사상에 대해 교훈을 던지는 ‘디다케(Didache)’와는 확연히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독교의 케리그마를 가장 선명하고 짧게 기록해 놓은 곳이 고린도전서 15장3절 이하입니다. 기독교역사 내내 신학자들이 모두 동의한 내용입니다. (고전15:3-8) 3.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5.게바(반석,교회)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6.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7.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복음의 내용입니다. 먼저 사도바울이 복음을 누군가로부터 받았다고 하지요? 누구로부터 받았습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복음은 예수에게 받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케리그마의 내용이 뭡니까? 성경대로, 즉 창세전 언약대로, 하나님 계획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장사되셨다가(완전한 죽음을 의미), 언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셔서 모든 제자들에게 보이셨다는 것이 케리그마입니다. 여기에서 ‘보이셨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옵떼ωφθη’는 ‘옵타노마이όπτάνομαιG3700’의 직설법 과거 수동태입니다. (사전참조)- 호라오ὁράωG3708의 변형 그 단어는 단순히 ‘보다’라는 의미의 단어가 아니라, 연구를 목적으로 현저한 어느 것을 향하여 또렷이 응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교회에게 그렇게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교회에게만 나타나십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매단 빌라도나 헤롯이나 대 제사장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드실 수도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안 나타나시고 제자들,교회에게만 나타나십니다. 그게 응시에요.교회에게만 목적물로 자기를 계시하고 깨달아 가시게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옵타노마이가 쓰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그 분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게 ‘옵타노마이’입니다. 거기까지가 복음입니다. 케리그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살아나셨다’까지만이 케리그마라면 그것은 자칫 관념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 지적동의하는 것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관념으로 갖고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자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을 현저한 목표로 제시하신 후 당신만을 응시하게 만드시는 것’까지가 케리그마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그건 삶이며 생명이며 실제입니다. 관념이 아니고요 그래서 선택된 성도는 유기되기 위해 지어진 세상과 확연히 다른 삶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옵타노마이’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로마서 6장 4절이, 우리 성도의 구원 목적을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분명하게 기록을 해 놓은 것이라 했습니다. 물론 그 행함은 아담들의 선악체계가 정의하고 합의해 놓은 틀 속에서의 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했지요? 그 행함은 곧 믿음으로 결과 되어 지게 되는 행함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그리스도의 영,성령으로 성도 각자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을 현저한 목표물로 제시하시고 당신만을 응시하게 하시는(옵타노마이), (‘내가 너와 영원히 함께 하리라,너를 떠나지 않으리라’하셨습니다. 나타나서 끝까지 같이 있는 겁니다.그게 동행이라고 하니다.)-녹취추가 은혜의 동행이 최종적으로 목적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질문 속에 답이 있습니다. ‘나만 바,예수만 봐, 예수만 의지해’입니다. 제가 거의 20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서 이제 갓 두 달이 지났습니다. 모든 게 낯설고 어색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는 거의 40년 만에 한국에 돌아오는 것이고, 우리 아이들 셋은 모두 미국에서 태어나서 거기서 자라났으니 완전히 다른 나라로 전입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나라에서의 모든 것이 얼마나 어색하고 낯설겠습니까? 문화나 음식, 사람들의 보편적 성격이나 습관, 관습이나 전통, 모든 것들이 낯섭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나은 제가 제 아내를 데리고 매일같이 낯선 한국살이를 경험하게 해 줍니다. 늘 동행하면서 동사무소부터 시작해서 운전면허 시험장, 구청, 시청, 법무부 출입국 관리소, 마트에서의 장보기, 등등 한국살이에 필요한 것들을 경험하게 해 주려 애를 씁니다. 다른 나라로 옮겨진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너무 낯설고 이질적인 요소들 앞에서 실수투성이입니다. 운전을 하다가도 욕을 먹기 일쑤고, 마트에서 물건을 사고도 다 챙기지도 못하고 그냥 나옵니다. 미국에서는 쇼핑한 물건들을 직원들이 완벽하게 봉투에 다 넣어 주는데 여기는 자기가 다 챙겨서 장바구니에 넣어 나오거나 박스를 만들어서 거기에 넣어 나와야 하니까 그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동사무소나 구청에서 서류를 발급받는 데도 다른 사람들보다 두 배 이상의 시간이 걸립니다. 한국말도 어눌한 데다 신청서 양식을 찾는 데만도 30분 이상 걸립니다. 저는 제 아내와 동행은 하지만 제 아내가 한국이라는 나라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가만히 보기만 합니다. 어떨 때는 답답해 죽습니다. 확 제가 다 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차 뒤에다가 ‘저도 제가 무서워요’ 이런 거 안 달고 다니고 싶습니다. 그러나 놔둡니다. 저 없이도 훌륭한 한국 사람으로 잘 살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께서 그렇게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그런데 그 목적지가 조금 다릅니다. 우리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성도와 동행하시는 건 당신의 약속이었습니다. ‘내가 영원히 너와 함께 하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생경한 하나님 나라로 전입이 된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그렇게 신랑과 동행을 하며 천국살이를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들의 나라로 옮기시고는 그 나라를 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아담들에게는 이 세상 나라가 너무 익숙합니다. 그래서 천국살이가 참 낯설고 어색합니다. 그래서 실수도 많이 하게 됩니다. 천국살이의 매뉴얼이 말씀으로 주어져 있는데 잘 안됩니다. 그렇다고 신랑이 대신 살아주지도 않습니다. 동행은 하시는데 어떨 때는 그 분이 날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신 것처럼 그 분의 침묵과 부재 속으로 밀어 넣으시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고스란히 그 실수와 실패를 신부가 다 경험해 내야 합니다. 부끄럽습니다. 창피합니다. 어떨 때는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그러한 역사 속 천국살이를 통해 신랑이 목적하는 바가 뭐일 거 같으세요? 천국 신부다운 성숙과 자라남일까요? 신랑 없이도 ‘혼자서도 잘해요’의 삶을 잘 살 수 있는 그런 변화입니까? 그렇게 자라나지 못하면 신랑이 화가 나서 우리를 버리기도 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우리 신랑은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검둥이 노예 술람미였을 때에, 창녀 고멜이었을 때에, 나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랑이 이 세상에 오셔서 ‘내가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성숙과 자라남과 신부다움이 목적이셨으면 고멜이나 술람미나 잉태하지 못하는 하와, 사라, 라헬, 리브가, 마리아 같은 여자는 쳐다보지도 마셨어야 합니다. 빵 부스러기 같은 은혜를 구하던 개 같은 이방인 여자는 거들떠보시면 안 됩니다. 열두 해 부정한 하혈만 하던 그런 여자를 신부로 맞으시면 안 됩니다. 신랑이 다섯이나 있었던 그런 여자를 만나기 위해 우물 가로 달려가시면 안 됩니다. 간음하다 걸려서 개망신 당하고 있던 그런 여자 품어 주시면 안 됩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창녀와도 상대하시면 안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자들을 신부로 부르셨습니다. 그런 자들을 위해 주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들을 품고 죽으신 주님이 사흘 만에 그들을 품고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 역사 속에서 그들의 응시 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들과 통섭하십니다. 그 통섭의 목적이 무엇이겠느냐는 것이 제 질문입니다.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 의 consilience 로서의 통섭이 아닌 ((통섭 (統攝,Consilience)은 "지식의 통합"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연결하고자 하는 통합 학문 이론이다. 이러한 생각은 우주의 본질적 질서를 논리적 성찰을 통해 이해하고자 하는 고대 그리스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두 관점은 그리스시대에는 하나였으나, 르네상스 이후부터 점차 분화되어 현재에 이른다. 한편 통섭 이론의 연구 방향의 반대로, 전체를 각각의 부분으로 나누어 연구하는 환원주의도 있다. 1840년에 윌리엄 휴얼은 귀납적 과학이라는 책에서 "Consilience"란 말을 처음 사용했는데, 설명의 공통기반을 만들기 위해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들과 사실에 기반한 이론을 연결함으로써 지식을 통합하는 것을 뜻한다. "통섭의 귀납적 결론은 사실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분야를 통한 결론에 의해 얻어진 귀납적 결론이 또 다른 분야에 의해 얻어진 결과와 일치할 때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통섭은 어떤 것에 대해 발생한 사실을 해석하는 이론들을 검증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귀납적 결론이란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서만 통섭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 현대적 관점으로 볼때 각 지식의 분야들은 각각의 연구분야의 활동에서 얻어진 사실들에 기반하여 연구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 들이다. 그렇지만 또 다른 연구분야의 활동에 의존하는 면이 크다. 예를 들어 원자물리학은 화학과 관련이 깊으며 화학은 또한 생물학과 관련이 깊다. 물리학을 이해하는 것 또한 신경과학이나 사회학, 경제학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된다. 이렇듯 다양한 접합과 연관은 여러 분야 사이에서 이루어져 왔다.))...위키백과사전참조. 사귐과 소통의 통섭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랑이 신부를 통섭하여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너 나 없이 살 수 있어? 안 되지?’인 것입니다. 신부는 신랑의 통섭 속에서 ‘난 신랑 없으면 이 나라에서 무용지물이구나, 먼지에 불과한 존재구나’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역사 속 천국살이의 목적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