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남자가 ‘잇쉬אישׁ’,여자가 ‘잇솨אשׁה’
161. “남자가 ‘잇쉬אישׁ’,여자가 ‘잇솨אשׁה’
‘알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 ‘야다יךעH3045’가 ‘동침하다, 연합하다’ ”....
- 산상수훈(15) 간음하는 이들이여 오른 눈을 뽑고 오른 손을 찍어라(I) ...본문기록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혼인 장면이 어디입니까?
창세기 2장의 여자의 탄생 장면입니다.
(창2:21~25)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
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
25.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 하니라
구약 성경에서 잠이라는 것은 종종 죽음을 비유하는 개념으로 쓰입니다.
열왕기서 같은 책들을 보면 왕들이 죽었을 때 그들이 잠들었다는 표현을 많이 하지요?
그게 창세기 2장의 아담의 잠과 같은 단어입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하는 그 구절에서의 잠도 역시 죽음입니다.
이렇게 남자의 죽음을 통해, 남자의 것을 재료로 하여, 거저 탄생하게 되는 것이 신부입니다.
그래서 남자가 ‘잇쉬אישׁH306’이고 여자가 ‘잇솨אשׁהH802’입니다.
그 말은 남자에게서 나온 자라는 말입니다.
그러한 신랑이 신부를 어떻게 인식을 하지요?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인식을 합니다.
‘너는 나다’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신부의 존재를 신랑 안으로 몰입시키는 차압의 선언입니다.
너는 나 없이는 절대 존재일 수 없다는 창조자의 말입니다. 그 둘 사이에는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신부가 아무리 부끄러운 짓을 해도 신랑은 다 품습니다.
그래서 그 아내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어구가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전적인 의존이요 신뢰입니다.
내 신랑의 사랑은 나의 그 어떤 약점과 허점도 다 품어 안는 엄청난 사랑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창세기의 신부 탄생의 이야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예시가 되어 있습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이 되는 일, 그 일을 통해 혼인잔치가 완성될 것이라는 언약입니다.
여기에서의 남자는 아담이고 여자는 하와입니다. 아담은 최초의 인간입니다.
그가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이 말은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 역사 속으로 관입이 되어 십자가를 지심으로 신부를 창조해 내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혼인관계입니다.
이 구절이 나중에 에베소서에서 바울에 의해 그대로 인용이 되어 쓰이지요?
그러한 혼인관계를 잘 이해하고 있는 신부들의 신랑관과 결혼관이 어떠하겠습니까?
‘나는 신랑이 없었으면 존재일 수도 없는 자였다, 신부인 나는 신랑이라는 몸의 지체이므로
신부는 신랑이라는 몸의 영광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그렇겠죠?
그런데 신랑의 죽음에 의해 창조된 신부가 자신의 개별적 자아를 챙기기 시작하고
개별적 업적과 공로를 추구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랑이 신부를 만들어 한 몸으로 끌어 당겼는데 신부라는 가지가 스스로 독립을 하겠다고 나서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 한 몸이 둘로 분리가 되겠지요?
그걸 간음이라고 하고 이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지가 나무에서 독립하여 떨어져 나가는 거예요. 그건 곧 죽음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간음이나 이혼은 은혜의 복음을 무시하고 율법주의와 인본주의를 추구하며
신부들의 독립을 증명하려 하는 모든 시도와 행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체들의 독립선언,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의 분리시도를 예수님께서 알기 쉬운
이야기로 풀어주시는 대목이 있습니다.
(요15:4~6)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이게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혼이요 간음의 현실인 것입니다.
한 몸으로 존재해야 하는 신랑과의 관계에서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겠다고 독립 선언을 하는 것,
그게 얼마나 무모하고 무식한 짓인지 잘 배우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이 인생과 역사를 통해 체휼해 내어야 할 중요한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진 스스로의 역사를 질질 끌며 창녀 고멜처럼 신랑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성
도의 신앙생활의 목적지인 것입니다.
그 때 신랑은 보리 한 호멜 반과 은 열다섯, 합이 은 삼십으로 그 걸레 같은 창녀를 도로 사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혼인 잔치는 그렇게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제일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도 역시 어린양의 혼인잔치로 그 끝을 맺는 것입니다.
(계19:7~8)
7.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창세기에서 최초의 혼인잔치가 배설이 되고 역사의 끝인 요한계시록에서 혼인잔치가 완성이 됩니다.
그리고 그 전체 기간을 ‘아내의 예비’기간이라고 명명합니다.
그러니까 이 역사와 인생은 무엇을 목적으로 지어진 것이지요?
어린양의 신부들의 예비 기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비를 한다고 하지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음으로 예비를 한다고 합니다.
8절을 보시면 그 세마포를 스스로 입습니까, 누가 입혀줍니까?
신랑이 입혀주지요? 수동태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 세마포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합니다.
그 성도들의 옳은 행실을 예수님께서 확실하게 정의 내려 주세요.
(요6:28~29)
28.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하시니
뭐가 성도들의 옳은 행실입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믿는 것이 성도들의 옳은 행실입니다.
착한 일 많이 하고 나쁜 일 적게 하고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 믿는 믿음이 바로 신부들이 입어야 할 예복, 세마포인 것입니다.
그거 없이는 혼인잔치에 못 들어갑니다.
이렇게 성경은 맨 앞과 맨 뒤가 혼인 잔치라는 사건으로 막혀있고 그 중간에 이 혼인잔치의 내용과 과정이 설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조를 인클루지오(inclusio) 구조라고 했습니다.
양 쪽의 빵을 강화하는 샌드위치의 속, 그 전체는 혼인잔치, 이게 성경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 가장 처음 내리신 명령이 ‘생육하고 번성하라’였던 것입니다.
그건 혼인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육과 번성은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가능한 것이었지요?
(그 생육과 번성에 관해서는 제가 전에 로마서 강해 때 자세하게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걸 참조해 보세요.)
그러니까 이 생육과 번성의 명령은 엄밀히 말해 하나님의 청혼 장면인 것입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결혼하여 한 몸이 될 거라는 하나님의 프러포즈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야기입니다.
(호2:19~20)
19.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20.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야다יךעH3045)
하나님께서 창녀 고멜(없음)같은 우리에게 청혼 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리로 우리에게 장가를 드신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됩니까?
우리가 여호와를 알게 된다고 해요.
여기에서 ‘알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
‘(야다יךעH3045)’가 ‘동침하다, 연합하다’라는 의미라 했지요?
창세기 4장 1절의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매(야다יךעH3045)’의 그 동침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와 혼인하여 하나님과 연합시켜내시기 위해 이 역사를 창조해 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부가 자신의 처음자리를 잊어버리고, 신랑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함으로 자기 자신의 존재성과 개체성을 추구하며 스스로가 성공과 번영과 성숙의 주체로 서게
될 때 그것을 간음이라 하고 이혼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끄러워집니다. 자신의 약점이나 부족함이 배우자에게 부끄러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신랑은 더 이상 용서와 은혜와 사랑의 신랑이 아니라,
나의 외모와 성취의 정도를 가지고 나를 판단하는 정죄와 심판의 신랑이 되거든요.
그렇잖아요? 부부가 사이가 좋을 때에는 함께 샤워도 하고 옷 갈아입을 때에도 부끄러움이 없어요.
그러다가 부부 싸움이라도 하고 나면 옷 갈아입을 때 근처에만 어슬렁거려도 수건 집어 던지면서 ‘어딜 들어와?’하잖아요.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신랑이신 하나님과 단절이 되자 부끄러워 나무 뒤로 숨은 것입니다.
그리고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가리려 했던 것입니다.
그걸 율법주의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역사 동안에 바로 그 치마를 찢어서 벗겨내시고 다시 하늘 부부 간의 한 몸 됨의 화목을 성취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복음의 현실을 사도 바울이 이렇게 설명해 내고 있습니다.
(엡5:22~32)
22.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24.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 지니라
25.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28.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30.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31.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는 있지도 않은 부부라는 관계를 이 땅에 허락하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랑이 교회라는 신부를 어떻게 창조했고 어떻게 사랑했는지를 교훈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편들은 열심히 아내를 사랑하며 육적 신랑의 한계와 영적 신랑의 위대함을 배우고 아내들은 허벅지를 찔러가며
남편에게 복종해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배우고 간혹 남편에게 복종되었을 때의 희열도 조금 맛보고 하는 것이
결혼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서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참아주고 안아주고 하세요.
그렇게 해 봐야
우리의 한계도 경험하게 되고 신랑 되신 하나님의 은혜가 진심으로 찬송되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