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강건과 낙심,겉 사람과 속사람,플라톤의 이원론
167. 강건과 낙심,겉 사람과 속사람,플라톤의 이원론...(에베소서는 총 6장)
- 에베소서.41 속사람의 강건을 위해 기도하십니까?..본문기록
(엡3:14-21)
14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근거로 ,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강건””이라는 말 ““크라타이오-κραταιόωG2901””는
(사전참조-‘힘이 부여되다’,힘이 강화되다..등:기본어 크라토스κράτοςG2904-통치,세력,권능.등)
13절의 ““낙심”” ““엨카케오έγκακέωG1457b””라는 말의 반대말입니다.
(브니엘 사전참조-용기를 잃다,낙심하다,지치다,싫증나다등..
-고전 헬라어문헌의 용법에서 (엔ένG1722;안에,말미암아,~에) 와 (칼레오καλέωG2564;부르다)에서 유래
(엡3:13)
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여러분, 속사람이 뭡니까? 속사람은 영혼을 말하는 것인가요? 겉 사람은 육신을 말하는 것이고요?
아닙니다. 그것을 헬라의 이원론이라 합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를 공격한 이단적 가르침이었습니다.
헬라 사람들의 이원론은 플라톤의 이원론을 말합니다.
공간적,존재론적 이원론 우리도 물론의 이원론을 이야기하지만 시간적이원론을 애기합니다.
저 천상의 ““이데아””가 실체이고 이 땅의 것들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영적인 것은 아름답고 고귀한 것, 육적인 것은 속되고 저급한 것이라는 가르침을
복음과 혼합시켜서 육적인 자기 몸을 마음대로 시궁창에 굴렸던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영은 이미 거듭났으니까 껍데기는 무얼 해도 상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무율법주의 영지주의 만들어 냈던 그러한 가르침이 바로 이원론입니다.비단 고린도 교회뿐이겠습니까?
그런 이단의 가르침은 오늘날까지도 신자들의 신앙을 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속사람은 영혼과 육신을 다 포함한 거듭난 ““(네페쉬נפשׁ)””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신을 모두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듭나지 못한 죄인들은 그의 영혼이 하나님과 영적인 것들을 분별할 수도 없고 반응할 수도 없는
상태에 있는 자들이고 거듭난 자들은 그 영혼이 하나님을 인식하고 자각할 수 있게 된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기는 본질적인 인간””을 속사람이라 합니다.
겉 사람은 우리 거듭난 사람에게 남아있는 하나님 없이 살도록 훈련되어지고 길들여진
또 하나의 성향, 경향 등 속 사람과 반대 되는 모든 부분을 겉 사람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마징가 Z의 아수라 백작처럼 속사람과 겉 사람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속사람이 자꾸 강건해져야 겉 사람이 후패 되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겉 사람과 속사람이란 표현은 성도 전인을 다른 측면에서 관찰한 것입니다.
나,영혼과 육신을 다 포함한 하나님께 반응하는 나를 속사람이라고 하고
하나님께 반응하지 않고 세상에 길들여 진대로 살고자 하는 또다른 나를 겉사람이다 이렇게 애기하는 겁니다
이것을 자꾸 분리해서 생각하려 하면 안되는 거란 말입니다
(고후4:16)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엑소έξωG1854)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에소έσωG2080) 날로 새롭도다
이 속 사람이 강건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울의 기도가 어떤 기도 다음에 드려지는지 잘 보셔야 합니다.
2장 말미에서 “너희의 신분은 이러이러한 자들이다“라고 선언해 놓고 그 다음에 나오는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 이후에
(홍해를 건넜다 해서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가야할 길이 있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12:5-11)
5 너희 어린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 이 달 십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곧 소화하라
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을 받고 있고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구원의 3시제).
우리가 이 땅에서 구원을 받는 동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속사람의 강건(强健)입니다.
속사람의 강건함으로 우리가 힘을 키워 무엇인가를 이겨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만사형통, 탄탄대로는 아닐 거라는 것을 금방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도 계속해서 속사람의 강건(强健)을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아가야 한다면
분명 우리에게는 그 강건함으로 이겨내야 할 싸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에베소서는 총 6장으로 되어있습니다.
3장까지가 교리 부분이고 4장부터가 실천 부분이라고 설명을 해 드렸었지요?
4장 1절이 ““그러므로““라고 시작이 되지요?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가
4장부터 6장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3장까지 에서만 머물고 있지 더 이상 삶의 부분으로 걸음을 내딛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4장부터의 투쟁의 삶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속사람의 강건함인 것입니다.
성화………………………………………….
많은 사람들이 홍해를 건넌 감격 속에서만 머물면서 엉터리 같은 신앙생활을 합니다.
마치 고린도 교회처럼 구원은 이미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막 살아도 된다는 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 나는 이제 모든 것을 다 이루었어, 난 이제 더 이상 놀랄 것이 없어””
그런 사람은 지금 ““아, 하나님은 딱 나 만 하구나.”” 하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더 놀랄 것이 없다니요? 우리는 어디까지 자라야 하는지 아십니까?
(엡3:19)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는 자리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난 더 이상 놀랄 것이 없어, 난 이제 목적지에 다 왔어””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끊임없이 성숙해 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엡4:13)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until we all reach unity in the faith and in the knowledge of the Son of God and become mature, attaining to the whole measure of the fullness of Christ.
(표준 새 번역)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성숙해 져 가야 합니다. 그 길에 필요한 것이 바로 속사람의 강건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