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8. 10. 17:35ㆍ카테고리 없음
93.복,영생,시간,거룩,안식,할례,예수그리스도.
- 요한복음강해 ‘21.요한복음 5장으로 보는 기독교의 인식론 본문기록...
하나님의 첫 창조와 일곱째 날의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게 될 이제 다시는 타락할 수
없는 새 창조와 그 새 창조의 완성으로 오게 될 진짜 참 안식을 그림자로 보여주는 것이었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 또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게 될 참된 안식의 땅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은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 공히 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복을 주셨습니다.
‘복’ ‘바라크 בּלקH1110’가 뭐라고 했지요?
하나님으로부터 피조물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생명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복을 주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 안식일에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생기게 된 죄와 수고로움에서 자유롭게 되어 우리가 누리게 될 진짜 안식 즉 ‘영생’이라는 씨앗을 심어 놓으셨다는 말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안식일에는 앞으로 긴 세월 후에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게 될
‘구원, 영생’이라는 씨가 그 내용으로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복을 담아 두셨다’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섯째 날 인간과 육축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 복은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복입니다.
이 물질 세계, 공간 세계, 감각 세계에 복을 주셨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일곱째 날에 복을 주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시간이라는 초월적인 영역에다가 복을 부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렇죠?
여러분, 시간이 뭡니까? 우리는 시간이 뭔지 잘 몰라요.
우리는 물질과 공간에 대해서는 아주 익숙합니다.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또 내가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아주 익숙합니다.
그런데 시간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시간은 전혀 우리가 통제할 수가 없어요.
공간과 물질은 우리가 마음대로 만들었다 부수었다 할 수 있지만 시간은 전혀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측정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그냥 뚝뚝 잘라서 우리가 이름을 붙여 놓은 것을 우리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1968년에 국제 도량형 위원회(CGPM)에서 세슘원자의 복사주기에 91억 9천만 배를 곱해서 1초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가 그것을 1초라고 부르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냥 막연히 그 시간이라는 것이 흘러가면 우리 인간이 늙고 병들고 약해져서 결국은
죽게 된다는 것 정도로 시간을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시간을 두려워합니다.
그 시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물질과 공간 속으로 숨어들게 됩니다.
우리는 시간 앞에서 그렇게 무력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시간 중의 어떤 날을 거룩하게 만드셨고 그 거룩한 시간에 복을 부어 놓으신 것입니다.
‘거룩‘’카다쉬 קךשׂH6942’라는 단어가 제일 처음 쓰인 곳이 바로 창세기 2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 주사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셨다’ 여기서 처음 거룩(카다쉬)라는 말이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거룩’은 공간과 물질세계에 처음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시간’에 처음으로 쓰였습니다.
‘거룩한 시간’
하나님은 인간들이 물질과 공간, 감각 세계에 목숨을 걸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라는 시간에 복을
부으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고 물질과 공간, 감각 세계에서 눈을 돌려 ‘시간의 세계’를 바라보라고
안식일을 주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공간적이며 장소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안 된다고 했지요?
하나님 나라는 죄로 말미암아 끊어졌던 하나님의 생명력, 즉 복이 회복되어 영원히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 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의 개념으로 이해를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영원은 시간이 아닙니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한계 내에서 우리가 가진 단어들로 설명을 하려니까 시간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네요.
그렇게 천국은 장소 적 공간적 개념이 아니기에 이 지구라는 공간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시간의 개념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 헬라 철학은 이데아와 현실, 공간적 이원론이지만
우리 기독교는 이 세상과 다가오는 세상의 시간적 이원론입니다.
우리가 고대하고 소망하는 것은 그 다가 올 시간, 영적 세계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그 안식일이라는 시간에다가 ‘영생’이라는 씨앗을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시간에 복을 주셨다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안식일이라는 시간에다가 복을 부어 주셨다는 것은 그 안식일이 하나님의 참 복인 영생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교회에게 주지시키시기 위해 그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3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언약의 표징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출31:16-17)
16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17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솨바트שׂבתH7673-안식일)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나파쉬נפשׂH5314-호흡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표징으로 주신 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할례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이 안식일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뭡니까?
‘너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 중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택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그들을 구원해 내시고,
그들에게 영원한 천국 생명을 허락하시겠다는 것이 언약의 실체입니다.
그 언약의 표징이 할례와 안식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할례는 ‘이 사람은 하나님에게 선택 된 이스라엘 백성이다’라는 symbol 이었지요?
언약의 축복의 보증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행하라 명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아들의 할례를 행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죽이시려고 했던 장면이 성경에 나오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니까요.
안식일도 바로 그 언약의 표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언약의 밖에 있는 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는 사람들 이외의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사망이죠?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언약의 표징인 안식일을 범하면 하나님께서 죽이라고 엄명을 내려놓으신 것입니다.
그 언약의 밖에 있는 자들은 이렇게 죽게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단지 그날, 토요일이 뭔가 범상치 않은 대단한 날이라서가 아니라 그 날이 갖고 있는, 그날이 상징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얻게 될 영생이요, 구원이기 때문에 그 날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죽은 것입니다.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의 설명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할례를 받지 않거나 안식일을 어기면, 그 언약의 표징을 행하지 않으면
그 언약밖에 있는 사람으로 간주해서 죽이는 것입니다. 상징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
그리고 그로 말미암게 될 진짜 참 안식과 영생을 상징하던 것이었습니다.
(골2:16-17)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크리노 κρίνωG2919-구별하다,즉(마음으로 또 사법상으로 )결정하다...)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안식일의 실체는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범하는 자를 죽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자들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독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 안식이 뭐라고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 세상의 죄와 수고와 질병과 고통, 갈등, 투쟁, 슬픔 이모든 것들이 전부
물러간 영생의 상태를 안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진짜 안식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영생을 상징하는 안식일에 병자가 있다는 것이 뭡니까? 그 안식일은 불완전한 안식일이죠?
그러니까 그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심으로 예수께서 그 안식일을 완전하게 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안식이다. 바로 이게 영생이다’
안식일에 일을 한 사람을 죽여 버리신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스스로 성을 쌓고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를 지켜내야 하는 그러한 나라가 아닙니다.
참 안식이 이루어진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지는 영원한 생명력, ‘복’을 받아 행복을 누리는 나라인 것입니다. 안식일이 담고 있는 내용이 바로 그 온전한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에 안식일에 자기를 위해 일을
하는 자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게 될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상징으로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이미 그 안식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히4: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카타파우시스κατάπαυσιςG2663-휴식)에 들어 가는도다
카타파우오καταπαύωG2664;정착하다,그만두게하다,휴식하다 에서 유래
카타 κατά G2596;~아래로,~에 대하여+파우오παύωG3973;멈추다,단념하다,끝까지오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믿는 자들이 안식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식에 들어간 자들은 자기의 일을 쉰다고 합니다.
(히4: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카타파우오καταπαύωG2664
여기서의 자기 일(이디오스ἴδιοςG2398)이 뭡니까?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고 쌓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이제 하나님의 생명력, 복이 회복되어 부어지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 스스로 자기를 지키려 안간힘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안식일 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인 것입니다.
그렇게 안식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안식에 들어간 자들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과 다른 선한 일이 그들의 삶 속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안식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만 너희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보고 너희 삶 속에도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나타나지
않거든 두려워하라는 말입니다. 그게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의 진의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 자리에 오게 된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 은혜를 입은 자들은 절대 함부로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예전과 다름이 없다면 내 안에 선한 일이 시작이 안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셔야 합니다.
안식일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담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뿐 아니라 그 안식일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 지도 몰랐고 그 분이 하신 일이 어떠한 것을 상징하고 있는 지도 몰랐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