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비트겐슈타인의,토끼 오리 그림같은 세상과 절대언어 ,복음:...

2014. 8. 10. 09:32김성수목사님

127. “ 비트겐슈타인의 토끼 오리 그림같은 세상과 절대 언어,복음”... - 에수님의 비유 19강“주체냐 대상이냐”본문기록... (마13:44-50) 44.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45.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47.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49.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50.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여러분은 이 그림이 무엇으로 보이십니까? 길쭉하게 나온 부분을 부리로 보면 오리 같기도 하고 그 부분을 귀로 보면 토끼같이 보이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이 그림은 토끼다'라는 명제와 '이 그림은 오리다'라는 명제 중 어떤 명제가 참입니까?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둘 다 참일 수도 있고 둘 다 거짓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직관과 심지어 사유까지도 각자의 세계관이나 그가 처한 상황이나 환경 등에 의해 각기 다른 모양으로 인식이 되고 표출이 되기도 합니다.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20세기 분석철학, 언어철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비트겐슈타인은 위의 토끼 오리 그림을 예로 들어서 인간의 언어는 그 자체에 참과 거짓의 명제적 본질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라고, 그의 후기 철학에서 주장을 했습니다. 언어의 의미는 명제 속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용의 맥락 속에서 정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어떤 물건을 보고 '아름답다'라고 그 대상의 의미를 명제 화 했을 때, 그와 다른 삶의 흐름 속에 들어 있는 이가 '추하다'라고 그 대상의 의미를 명제화 할 수 있다는 것입 니다. 따라서 언어는 그 담지자의 진짜 본질을 하나의 명제로 담아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위의 토끼 오리 그림을 내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저 그림을 비트겐슈타인의 토끼 오리라 부릅니다. 그의 논지는 플라톤 철학이 지배해오던 서구사회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플라톤 철학에서 '의미'는 항상 하나의 개념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었는데 비트겐슈타인은 그 개념의 의미가 삶의 흐름 속에서 계속 바뀐다는 것을 지적하며 자신의 스승인 러셀과 프레게의 이론을 거침없이 공격하여 그의 스승인 캠브리지의 버트란트 러셀이 더 이상 논리학의 무대에서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치명타를 가한 사람입니다. 20세기 분석철학의 최고라 인정을 받는 그가 그렇게 언어의 상대성을 주장하면서 포스트모던, 후기 현대사회라는 자동차의 가속 페달이 밟아졌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언어뿐만 아니라 사유나 사상, 종교, 이념 등에서도 상대화 운동이 급속히 진행되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더러운 유산으로 종교다원주의라는 것이 어기적거리며 기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절대적 종교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포스트모던 시대 속에서는 제가 보여드린 비트겐슈타인의 토끼 오리 그림은 토끼일 수도 있고, 오리일 수도 있다는 것이 정답이 되는 것입니다. 상대적 언어를 갖고 있는 인간에게 있어서 사물이나 사건, 인물 등에 대한 사유나 직관은 상대적으로 주관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담지자의 의미를 함부로 정의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언어로 정의되는 '의미'가 일정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그의 후기 저작인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라는 책을 보다가 비트겐슈타인이 놓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언어인 말씀에 대한 간과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인간 언어의 상대성은 저도 십분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인간 중에는 성도라는 구별된 무리가 있고 그들에게는 특별한 언어가 주어졌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 하늘 백성들에게 주어진 상대화 될 수 없는 절대언어, 절대명제가 있는데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그 하늘의 절대 언어에 의해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절대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살전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속에서 역사 하느니라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G2588) 생각(G1761)과 뜻(G1771)을 감찰하나니(G2924) * 참고)1.마음의(카르디아καρδίαG2588) - 호(ὁ) 프뉴마(G4151 πνευμα) = 말씀.진리.성령. -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로 아가페(사랑)으로 가진자 = 카르디아(G2588καρδία)(심장)을 가진자가 됨 - 요한계시록에서 우리의 이름을 말씀이라 하심. - 심령이 가난한자, 진리.말씀에 갈급한자=프토코스(πτωχόςG4434) - 하나님의 사랑 마음을 내안에 진리로 갖고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을 용서,연합이라고 함. 2.생각(엔뒤메시스 ένθύμησιςG1761-숙고,고안,생각..) - 엔뒤메오마이(ένθυμέομαιG1760)에서 유래-영감을 받다,생각하다..to bring in mind ;엔(ένG1772~안에)+뒤모스(θυμόςG2372-욕정,격노,분노...)에서 유래 (뒤모스θυμόςG2372는 뒤오θύωG2380에서 유래) 달려들다,제사드리다,희생하다,살해하다,죽이다,제물을 드리다... 3.뜻(엔노이아ἔννοιαG1771)-생각이 깊음,이해,의도.act of thinking ;엔(ένG1772~안에)+누스(νουςG3563-지능,마음...) 의 합성어에서 유래 (누스(νουςG3563-지능,마음...)는 기노스코γινώσκωG1097어간에서 유래. 허락하다,알게하다,인식하다,말 할 수 있다,확신하다,이해하다 4.감찰하시고(크리티코스κριτικόςG2924-결정하는,구별하는,식별하는..) ;크리테스κριτήςG2923-재판관에서 유래 (크리테스κριτήςG2923는 크리노κρίνωG2919에서 유래) 구별하다,결정하다,언도하다,정죄하다,판결하다,판단하다,선고하다...등 이렇게 하늘의 언어인 말씀은 어떤 대상을 설명하는 용도가 아니라 그 자체가 주체로서 대상들의 의미를 규정해 버리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한 분이신 절대적인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그 절대적인 분의 말씀에 의해 통치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온통 상대성으로 혼란스러운 이 세상 속에서 절대적인 것을 구별해 내는 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토끼 오리 그림 같은 세상을 보면서 그 그림의 실체를 분명하게 짚어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 크리노κρίνωG2919 판단에 대해서 -로마서(28) 저주 받을 세상의 심판자들..본문기록 (롬2:1~5) 1.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 함이니라 2.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 하느뇨 5.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우리는 지난주까지 로마서 1장 마지막 부분을 공부하면서 정작 여기에 기록된 죄의 세목들의 주인은 예수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에 동의를 했습니다. 왜 예수를 믿는 우리 안에서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모양의 더러움과 추악함이 쏟아져 나오는가? 그건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우리 성도를 이 역사 속에 넘겨주셨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 목적은 다름 아닌 올바른 자 인식과 올바른 하나님 인식인 것이라 했지요? 우리 인간의 처음자리 확인과 그 자리에 임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능력을 살아있는 인격 안에서 이해하고 경험하고 돌아오라고 우리를 이 역사 속에 넘겨 버리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죽음의 땅, 무덤 속을 살면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체계를 뒤엎고 순리로 써야 할 것을 역리로 쓰며, 모든 불의의 행사를 끊임없이 쏟아 내면서도 자아제어 능력 상실로 말미암아 사망으로 치닫고 있는 우리의 실체를 자각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는 자로 완성이 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성도의 선악의 인식과 판단은 세상의 그것과는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선악의 판단을 스스로 하며 살도록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선악 판단의 주체는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들 스스로 법과 윤리와 도덕 등을 만들어 놓고 그러한 것들을 기준으로 하여 선악을 판단하며 스스로 선악 판단의 주체자로 서 버린 것이 타락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로마서 1장 말미에서 그토록 부르짖던 불의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부분에서 바울이 이 세상에게, 특히 성경의 독자들인 성도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의 강세는 ‘여기에 나열된 죄의 세목들을 하나하나 단계적으로 쳐 내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세목들을 인간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단죄하고 판단하여 사람들을 선인과 악인으로 갈라내려 하는 진짜 죄를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의 본질이 피조물의 하나님 노릇이니까요. 그래서 2장 1절에 ‘판단(크리노κρίνωG2919)’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쓰인 ‘판단, 크리노’라는 단어는 재판정에서 재판관이 죄의 내용과 질, 형량 등을 선고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사도는 이미 1장에서 성도를 포함한 모든 인간들이 유죄라는 것을 선고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어떤 무리에게 거저 부어진 것이 은혜라는 것과 그러한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이 구원을 받은 자들임을 분명하게 밝혀 놓았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전가 받은 그 의인만 산 의인이다’라는 선언이 바로 그것입니다. 믿음 외에 다른 그 어떤 행함으로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가 만들어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은혜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살아날 수 없음을 명시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처지에 있는 것이 인간들이라면 그 누가 있어 다른 이를 자신의 선악구조 하에 심판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1절부터 차근차근 보겠습니다. (롬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 함이니라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앞부분의 내용을 다 포괄하고 함의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그 ‘그러므로’를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의역을 해 보면 ‘이러한 것이 모든 인간들이 처해진 상황이라면’ 다른 말로 ‘의인은 믿음으로만 살게 되는 것이라면’ 정도가 되겠습니다. 그렇게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 날 수 있는 그런 존재이고 그러한 은혜에 의해 살아난 자들이 교회인데 너희 중 누가 함부로 다른 이의 선과 악을 판단하여 정죄하는 심판관이 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부분의 내용이 유대인들을 겨냥한 것이다, 아니다 이방인들을 겨냥한 것이다, 라는 논쟁이 지금도 분분한데 그건 정말 쓸데없는 논쟁입니다. 사도는 이 편지를 교회에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자연인의 그 죄를 여전히 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자신들의 구별됨을 주장하고 자랑하기 위해 교묘하게 자신들을 위장하는 법을 고안하여 획득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사도는 그들에게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이 내용들은 죄에 빠져 있는 자연인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과 동시에 여전히 그러한 자연인의 죄에다가 남을 판단하는 죄까지 짓고 있는 교회를 겨냥한 것입니다. 세상은 이 말씀에 의해 심판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고 교회는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굳게 붙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여러분 자신의 이야기로 들으셔야 하는 것입니다....로마서 강해중에서 목사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합니다. 첨부파일 127.비스겐슈타인의 토끼 오리 그림같은 세상과 절대 언어,복음.hwp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