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8. 5. 12:56ㆍ김성수목사님
서울서머나교회 91-1.여호와(יהוֹהH3068) 샬롬(שׂלוֹםH7965)... - 사사기 강해 ‘여호와 샬롬’본문중에서...
오늘 본문속에는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여호와 샬롬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샬롬이라는 단어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평강’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샬롬’하면 언약의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그 여호와 샬롬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배경이 좀 낯섭니다. 보통 ‘평강’하면 아무 일이 없고 평온한 상태를 떠 올리게 되는데 지금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로 말미암아 그의 연약한 정체를 폭로 당하고 죽어야 할 자로 드러나게 된 상태입니다. 그 상태에서 ‘여호와 샬롬’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여호와 샬롬’,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평강은 이 세상이 정의하고 기대하는 그런 유의 평강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기드온의 이야기 속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평강의 실체가 아주 잘 그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바대로 기드온은 원래부터 용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300인을 이끌고 미디안의 13만 5천 대군과 전쟁을 할 때에도 그가 한 것이라고는 항아리를 깨고 나팔을 불며 소리를 지른 것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그 소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강림에 대해 자세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따라서 그가 내지른 소리도 결국 그의 것 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기드온에게서는 용사로서의 면모를 조금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자에게 ‘큰 용사’라는 닉네임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 나라의 용사와 이 세상 용사와의 차이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 용사는 자신의 힘과 열심과 노력을 근거로 결정이 되어 지는 반면에 하나님 나라의 용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의 문제로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발생이 되는 하늘의 용사는 반드시 그 존재의 비워짐이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있으니까요. ***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란 곧 연합을 의미하는 것인데 연합이란 나와 하나님의 힘이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인 나의 내용이 비워지고 하나님이 내 안에 채워지는 것을 연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늘의 용사는 존재의 비워짐이란 전제를 반드시 통과해야 합니다. 물론 그건 이 세상에서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향성의 문제입니다. 하늘의 군사, 하늘의 용사들의 삶의 지향성은 존재의 비워짐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하나님과의 연합의 현실이 문득 문득 경험이 되어 진정한 하늘 용사의 면모가 아주 가끔씩 우리에게 체감되고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렇게 자신이 부인되고 부정되는 가운데 더 이상 자신을 신뢰하거나 의지할 수 없어서 하나님께 자신의 존재를 내어 맡기게 될 때 그때 성도에게 찾아오는 것이 ‘여호와 샬롬’입니다. 그건 태평성대의 그 태평과는 또 다른 개념입니다.
사사기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 중에 하나가 ‘태평, 솨카트(שׂקטH8252)’라는 단어입니다. - 기본어근‘쉬게하다’;진정시키다.안정하다. ‘사사가 살아있는 동안에 이스라엘이 태평하였더라’의 그 태평입니다. 그런데 인간 사사에 의해 주어진 그 ‘솨카트’는 평강의 모형이기는 하지만 ‘샬롬’으로서의 실체는 아닌 것입니다. 인간 사사에 의해 주어지는 평강은 제한적이며 한시적입니다. 그 사사가 죽으면 금방 깨어질 평강입니다. 그러나 예수에 의해 주어진 평강은 영원한 것이며 완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사에 의해서 주어진 ‘평강’과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진짜 평강 ‘샬롬’이 다르게 표기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단어만 다른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모양도 많이 다릅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와 밀고 당기는 시험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에게 미디안을 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하는데 기드온은 한사코 사양을 합니다. 지난 시간에 제가, 그건 겸손이 아니라고 했지요? 모세나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의 명령을 한사코 사양한 것은 오히려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었습니다. 진짜 겸손은 ‘나’의 존재가 진정으로 무익하고 무용하다는 것을 아는 자들에게서나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은 ‘나’라는 존재의 힘이나 자격, 처한 상황이나 현실을 바라보며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나’라는 존재에게서는 선한 결과물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한 자들에게서 어떤 배짱이 생기겠습니까? ‘나’를 근거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신다면 ‘나’의 모습이 아무리 초라하고 연약한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나가겠다는 배짱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를 용사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비워진 사람에게서는 ‘하나님 마음대로 하세요’라는 용기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과 처지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힘과 지혜가 있어서 미디안을 격파할 충분한 자격이 된다면 자신도 나가 볼 의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포도주 틀에서 밀이나 벗겨서 먹는 초라한 신세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보고 어디를 나가라고 하느냐는 것이지요. 그걸 교만이라 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나’라는 존재가 그 존재의 소유와 가치를 사용하여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니까요. ‘교만, 휘브리스 ὕβριςG5196’라는 단어는 피조물이 자기의 자리를 벗어나서 신의 자리에 오르려 하는 지향성을 말합니다. 피조물은 원래 신의 통치 아래에서 죽은 흙의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야 그 비워진 그릇에 하나님의 풍요가 담기고 하나님의 능력이 담겨서 하늘의 존재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이 자신들의 존재성을 확보하고 추구하려 할 때 자아의 그릇이 엉뚱한 것으로 채워지게 되는데 그것을 교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절대로 평강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힘과 가치와 열매와 업적이 있어야 비로소 안심을 할 수 있는 그런 불신앙 속에서는 그 누구도 평강의 열매를 따먹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항상 자기보다 강하고 훌륭한 존재가 있기 마련이고 이미 꼭대기에 올라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그것을 지키고 수호하기 위해 늘 좌불안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의 만족을 위해 사는 빗나간 삶의 지향성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의 잘못된 삶의 지향성인 그 교만을 때려 부수십니다. 왜요? 당신의 백성들에게 진짜 평강을 주시려고요. 그 여호와의 평강이라는 말을 조금 쉬운 개념으로 바꾸면 ‘쉼’이라 바꿀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솨롬’이나 ‘솨카트’는 어근이 같은 단어인데 둘 다 평강입니다. 그런데 그 단어들은 모두 호흡과 관계있는 단어들입니다. 가쁜 숨을 몰아 쉬다가 고른 숨을 내 쉬게 되는 상태로의 전환에 쓰이는 단어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자신들의 안위와 행복과 기쁨을 자신들의 힘과 노력으로 쟁취해 내야 하기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죽는 날까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쁘게 살아야 합니다. 쉬운 말로 이 세상에는 진짜 평강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진짜 평강은 나 이외의 어떤 존재에 의해 내가 이루려 하는 모든 것이 완료가 되었을 때 그 완료된 상황 하에서 비로소 내가 숨을 고르게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말에도 휴식 혹은 안식이라는 말 안에 숨 쉴 식(息)자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게 여호와의 평강입니다.
가나안의 천수답 농사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께 맡겨 놓고 그분의 처사에 모두 맡겨버리는 상태에서 우리는 가쁜 숨을 비로소 고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속에서는 하나님 의존의 삶이 책임감도 없고 나약하고 못나 보이기까지 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평강과 이 세상의 평강이 다르다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평강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그 와중에서도 그 안에 평강이 있었다고 하신 것은 그 분이 하나님 아버지의 일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했었다는 것이고, 그 하나님 아버지의 일은 당신과 함께 창세전에 이미 영원 속에서 완료해 놓으신 창세전 언약에 관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상황 속에서도 평강을 가지실 수 있으셨던 것이고 그 속에서도 안식을 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편해 보였고, 불쌍해 보였으며, 나약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하늘의 평강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의 평강이 이 세상 속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날 때에 그 모습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평강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외양 속에 들어 있는 마음은 평강을 유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 마음을 쉬게하리라’고 말씀을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 속에 담겨 있는 평강입니다. 쉼은 쉼인데 마음의 쉼입니다. 그런데 겉모양은 쉼의 모양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기드온이 자신의 처지와 현실을 근거로 앞으로 전개될 미래의 상황을 추측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삿6:15)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 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자기의 가문이 므낫세 지파 중에서도 지극히 약한 가문이고 자신 또한 자신의 집에서 제일 작은 자이기 때문에 자기가 나서서 이스라엘을 구원한다는 것은 얼토당토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건 굉장히 겸손한 반응인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의 가문과 자신의 됨됨이, 그리고 자신이 소유한 세상의 힘이 하나님의 일에 가치있는 것으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고 하는 교만한 인본주의가 들키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 모습이 정확하게 샬롬과 반대되는 모습입니다. ‘나’의 존재를 근거로 실망과 좌절을 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하나님께서 거기에 뭐라고 대답을 하시는지 보세요.
(삿6: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나는 너의 됨됨이나 너의 능력이나 너의 처지나 너의 상황에 관계없이 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쓰시는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그가 용사가 되는 것이고 그에게서 평강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완료된 현실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들의 평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잠을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잠이라는 것이 한 낮 동안 바쁘게 몰아쉬던 숨을 고르게 쉬게 되는 상태니까요. 자기의 힘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고 완성하려는 자들이 잠을 제대로 자는 거 보셨습니까? 아무튼 그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대답에 기드온이 증거를 보여 달라고 여호와의 사자께 요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설득시키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기드온에게 나타나신 여호와의 사자가 금빛 옷을 차려입고 하늘의 병거를 타고 불이 붙은 번개 칼을 들고 나타나서 기드온에게 명령을 했다면 기드온이 이렇게 무례하게 증거를 보여 달라고 이야기를 했을까요? 아마 그 위용에 압도되어서 두말없이 ‘예’하고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이 아무리 뜯어 봐도 도저히 여호와가 보낸 사자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셨기에 기드온이, 당신이 주님이라는 증거를 보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만을 힘으로 여기는, 믿음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타락한 죄인들의 죄 성이 다시 한 번 폭로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그게 죄인들의 속성입니다. 기드온은 지금 여호와의 사자 앞에서 철저하게 죄인으로 폭로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죄인들에게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일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감지가 되고, 이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절대 안 되지요.
그러한 자들의 공통점이 뭡니까? 자신들의 정성으로 신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다는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뭐든지 눈에 보이는 것으로 해결하려 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뭐라고 하는지 보세요.
(삿6:18) 내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 하나이다 그가 가로되 내가 너 돌아오기를 기다리리라
자기가 예물을 가지고 올 테니 그 때까지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건 자기가 드리는 예물이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걸 전제한 요구였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드리는 가치 있는 예물이 여호와를 붙들어 둘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이게 성령 받지 못한 가짜들의 허울 좋은 종교행위라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인을 제공하고 하늘은 그 원인에 의해 결과를 내어 놓아야 한다는 인과론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기드온의 불신앙에, 알기 쉬운 그림으로 복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해 주십니다.
(삿6:21)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매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지팡이를 잡고 있습니다. 그 지팡이는 여호와의 사자의 손에 잡힌 기드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이야기의 내러티브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을 받게 되는 기드온의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기드온은 그 지팡이가 하나님에게 들려 쓰이기 위해서는 지팡이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드온에게 하나님이 주신 대답은 ‘내가 너와 함께 간다’였지 않아요? 따라서 여호와의 사자가 들고 있는 지팡이는 기드온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기드온이 준비한 예물은 기드온이 자신을 불살라 하나님 앞에 내어 놓으려 하는 기드온의 열심에서 발생이 된 열매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건 바꾸어 말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전쟁의 결과물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기드온은 그 열매가 자신의 열심과 노력과 힘과 지혜에 근거하여 맺혀질 거라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 열매와 결과는 당신이 맺으실 것이라는 걸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 예물에 다가 지팡이를 갖다 댑니다. 기드온의 생각대로라면 지팡이가 그 예물을 태워야 합니다. 그래야 지팡이의 능력이 입증이 되는 것이니까요. 만일 그렇게 되면 예물이라는, 하나님 앞의 결과물은 지팡이의 힘과 능력과 열심에 의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습니다. 지팡이는 예물을 가리키는 역할만 했고 불은 반석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손에 들려 쓰여 지는 지팡이의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가리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그 지팡이의 능력을 자랑하는 것이어선 안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 세상의 모든 지팡이들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화살표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화살표가 무슨힘과 자격이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게 되는 것이라는 오해가 오늘날 너무 편만하게 퍼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지팡이가 되어 예수가 하신 일을 믿는 것이고 우리의 삶으로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지 우리가 불을 뿜어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교훈 앞에서 기드온이 어떻게 됩니까? 그 때까지 눈으로 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자신의 힘과 노력과 열심을 가치있게 여기며, 그러한 자신의 힘과 열심을 근거로 하나님을 붙들어 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기드온이 갑자기 뭐라고 고백을 하지요? ‘난 여호와 앞에서 죽어야 할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자기 부인의 고백을 하는 기드온에게 ‘두려워 말라, 넌 죽지 않는다’라고 선언을 해 주십니다.
(삿6:22-23)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 자신을 불살라 하나님의 지팡이가 될 수 있다는 기드온의 인본주의 적 사고가 무너지자 기드온은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이 무력한 죽은 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한 자기부인의 고백 위에 ‘두려워 말라, 내 은혜가 너를 덮고 있으니 너는 죽지 않을 것이다’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선언이 떨어지는 것을 ‘여호와 샬롬’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성도의 최종 목적지인 것입니다. 마치 구원의 서정이라는 것이 일목요연한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 것 같지 않으세요?
(삿6:24)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 살롬 이라 하였더라
그러니까 여호와 샬롬, 여호와의 평강은 여호와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홀로 이루어 놓으신 완료된 구원을 면목 없이 찬송하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을 가리켜 재현하는 도구가 지팡이로서의 성도인 것입니다
|
'김성수목사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92 영원이라는 것은 (0) | 2013.08.05 |
---|---|
91 평강, 평화, 평안, 화평, 화목 (0) | 2013.08.05 |
헬라어,히브리 주요단어 (0) | 2013.08.05 |
90.쉐마 (0) | 2013.08.05 |
89 독수리 새끼 위에 너풀거리다(75번과 연결) (0) | 2013.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