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쉐마

2013. 8. 5. 12:51김성수목사님

90.쉐마שׂמע ...

 

- 사도신경강해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본문기록...

 

우리는 하나님만 사랑하는 자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자로 성숙이 되고 완성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선 것입니다.

그 모든 구속의 이야기가 적혀 있는 책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말씀, 구약의 율법이나 신약의 언약을 모두 통 털어 한 마디로 줄이면

‘주 너의 하나님을 목숨 걸고 사랑하라’가 되는 것입니다.

(마22:36~40)

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39절의 ‘둘째는 그와 같으니’라는 어구는 첫째와 둘째는 구별이 없이 동등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첫째의 사랑이 회복이 되면

둘째 사랑은 필연적이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사랑이라는 말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곳에서는 이웃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도 하는 것이고,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 사랑이 율법의 정수라

말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둘은 따로 떨어질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엣것이 파괴되면 뒤엣것도 파괴가 되고 앞엣것이 회복이 되면 뒤엣것도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롬13:8~10)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그렇지요? 그러면 이 쉐마는 어디에서 인용이 된 것인지를 추적해 보겠습니다.

(신6:4~5)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유대인들은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이스라엘에게 한 명령 중

신명기6장 4절에서 9절까지의 내용을 ‘쉐마’로 받아 경문에 넣어 차고 다녔으며,

아침저녁으로 암송을 했습니다. 쉐마라는 말은 신명기 6장 4절의 첫 단어인데 그 단어의 의미는

‘듣고 순종하라’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리고 대대손손 전하여 꼭 해야 할 일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라는 말입니다. 그건 곧 교회에게 떨어진 쉐마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의 약속의 땅, 즉 천국에서 하나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 사랑’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게 될 때, 자연스럽게 격발되는 것이 ‘나’이외의 다른 사람,

즉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사랑이라는 것은 이기적 자기 사랑에서

벗어난 자들에게서만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의 삶 속에서 당연히 이웃 사랑이 격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백성들에게 떨어진 쉐마는 원래 ‘주 너의 하나님을 마음을 다 하고, 뜻을 다 하고, 성품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당연히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므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으로 표기가 되고 회자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에게 요구되는 이웃 사랑의 개념이 조금 더 명료해 지지요?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에서 격발이 되는 이웃 사랑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 한해서

주어진 명령입니다. 그렇지요? 쉐마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넌 이들에게만 주어진 명령이란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어린양의 피라는, 같은 은혜를 입은 운명공동체인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웃은 누구이겠습니까? 함께 은혜를 입고 홍해를 건너 나와 약속의 땅을 향해 진군하고 있는

운명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동일한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운명 공동체를 신약에서 무엇이라 부릅니까? ‘교회’라 부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성도에게 요구하는 이웃 사랑은 교회 안에서의 이웃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율법의 명령은 하나님 나라 안에 속한 이들 간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쉐마가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것이니까요.

잘 생각해 보세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에서의 그 몸이 어떤 몸이겠습니까?

한 몸으로서의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롬12:4-5)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롬12:13)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우리가 복음을 올바로 이해를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있는 성도가 맞다면

우리와 함께 한 믿음 안에서 한 길을 가고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 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그 한 몸인 교회는 바로 내 몸이니까 자연스럽게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건 이제 우리가 열심을 내서 이루어 내야 하는 계명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어 내신 은혜와 축복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은 네가 밥 한 그릇 먹으면 이웃에게도 밥 한 그릇 가져다주고,

내가 백 불을 썼으면 이웃도 백 불을 쓰게 해 주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아, 너희가 받은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너희가 정말 안다면 그걸 한번 내놓아 봐라’라는 확인의 요구인 것입니다.

조금만 더 들어보세요. 성경은 분명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건 ‘나’를 사랑함이 전제가 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네 몸을 사랑함’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구원을 얻게 되면 그렇게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나’를 믿음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그렇게 새롭게 창조가 된 ‘나’를 인식하게 될 때

그 구원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지지요?

그 소중함과 그 감격이 바로 새로운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구원을 받았음을

아는 이가, 자기와 한 신앙으로 묶여 있는 다른 사람을 볼 때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저 사람도 나처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힘입어 구원을 얻은 사람인데

어떻게 내가 세상 적 기준으로 그를 평가하겠는가?’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그 사람을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쉐마의 진의인 것입니다.

그렇게 같은 운명 공동체 안에서 한 길을 가고 있는 한 몸으로서의 교회가 무엇인지를 아는 이들은 그 공동체의

구성원인 자기 이웃이 조금 못 배우고, 가난하고, 부족해도 절대 그를 우습게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자격이나

조건이나 상황이나 인격이나 성품 등이 그 사람을 판단하는 근거로 적용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나처럼 면목

없이, 그러나 하나님의 크신 사랑 안에서 함께 구원을 받은 귀한 영혼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구원을 얻은 성도는 돈 많고 권세 있는 사람들 앞에서 주눅 들지 않습니다.

그들도 역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니까요. 우리는 한 몸이거든요.

한 몸이 어떻게 스스로 주눅이 들고, 스스로 우습게 여깁니까? 그들도 다 내 몸처럼 구원을 얻은 사람들인데요.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한 성도는 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내 이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밖으로 자꾸 도망쳐 나가 이 세상 것들에 관심을 두고 거기에 착념할 때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가르치고, 훈계하고, 기도하고, 안타까워하며 그를 바로 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게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이웃을 오직 하나님의 사랑 안에만 거하도록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돈, 명예, 취미, 건강, 가족 등등, 내 이웃이

그런 것에 착념하느라 하나님 사랑을 자꾸 놓치고 있을 때 그냥 두고 보는 것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고 설교를 쏟아낼 때마다 여러분을 죽도록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교리와 잘못된 가르침에 의해 엉뚱한 것들을 바라고,

그것을 얻어내기 위해 예수를 이용하려하는 그런 못된 습관들을 향해 칼을 던져 도려내 버리는 것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사랑은 친절과 다른 것입니다. 친절은 사랑의 증상일 수는 있지만 동의어는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은 따뜻함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내 이웃을 붙들어

놓기 위해서는 때때로 나의 존재가 그들에게 날카로운 메스로 여겨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내가 주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나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이 세상의 힘이 아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만을 사랑하는 새로운 ‘나’가 너무 소중하기에 내 이웃 또한 내 몸처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선행이나 구제나 친절을 베풀지 말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사랑을 입은 성도의 당연한 열매입니다.

그런데 진짜 사랑은 그렇게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시라는 말입니다.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았다고,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고,

나를 알아주고 인정해 주지 않았다고 ‘저 사람은, 저 교회는 사랑이 없다’라고

너무 쉽게 판단해 버리지 마시라는 말입니다.

진짜 사랑을 하느라 불친절해 보일 수 있습니다. 진짜 사랑을 하느라 싸늘해 보일 수 있단 말입니다.

거짓되고 위장된 사랑을 오해시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가면을 써가며 친절을 가장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이 없다’라고 매도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싸늘함과 불친절 속에서 인간은 이렇게 사랑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배울 수 있는

실력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바로 사랑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분명 좋아함과는 다른 것입니다. Love 와 Like는 다른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언약적 사랑이며 의지적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원수에게 다가가 떡이라도 하나 더 줘 보라고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게 훈련을 해서 해 낼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말씀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의지적 사랑을 시도하는 과정 속에서 여전히 마음속으로는 그 상대방을 미워하고 있는 자신을 보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 꼭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기부인이 나오는 것이고 그러한 일이 반복이 될 때 우리 안에 사시는 예수의 사랑,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어진 이웃 사랑을 조금이나마 내 놓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말씀을 드립니다. 죽도록 사랑해 보세요. 최선을 다해 사랑을 주세요.

그리고 많이 실패하세요. 자신의 사랑 없음을 많이 폭로 당하세요.

그러나 그 자리에서 반드시 십자가를 붙드세요.

머지않아 여러분의 삶 속에서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진짜 사랑이 조금씩 풍겨 나오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이미 완성이 된 겁니다.

그걸 사단이 깔고 앉아서 우리 것 아니라고 우기고 있는 거예요. 사랑할 수 없을 때

그 마귀의 방해를 하나님께 고소하세요.

우리 집에 다른 이가 들어와서 자기 집이라고 우기면 어떻게 해야 해요? 당장 신고 해야지요.

왜 우리 것을 자기 것이라고 붙들고 안 줍니까?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그래요. 우리는 사랑에 실패할 때마다 스스로

자학을 합니다. ‘난 사랑할 수 없어’ 참 좋은 믿음이네요.

아닙니다. 여러분이 사랑할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주신 겁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예수 안에서 난 사랑할 수 있게 되었구나’를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꿇어 앉아 기도하세요.

예수가 십자가에서 이루신 현실이 오늘 내 것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세요.

 

목사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합니다.

 

첨부파일 90.쉐마....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