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1. 23. 13:08ㆍ김성수목사님
116-2. “ 올바로 이해한 성도의 자아 인식 ” ...
- 로마서 강해(3). “바울, 바울,바울 ”본문기록...
그 성경 전체가 말하고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올바로 이해한 성도의 자아 인식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나는 혼돈이며, 공허이며, 흑암이구나, 죽은 흙이구나,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은혜와 긍휼로 품으셔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내신 것이구나’라는 올바른 인식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하나님의 창조에 무슨 기여를 할 수 있습니까?
죽은 흙이 하나님의 창조에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어요?
그냥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 앞에 작은 자, 죽은 자로 서 있을 뿐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과 긍휼과 은혜를 깨닫고 나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자각하여 하나님 앞에 항복해 들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이란 말입니다.
내가 괜찮은 사람으로 변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입니다.
그건 그렇게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이해한 자들에게서 제일 먼저 일어나야 할 일은 자신의 티끌 됨의 자각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에 의해 은혜를 입지 못한 자는 절대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가 될 수 없습니다.
암탉이 품지 않은 달걀은 절대 부화를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피조물은 무엇을 자각하고 고백하는 자라고요?
‘난 하나님 앞에서 죽은 흙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시지 않으면 저는 존재일 수도 없습니다’라는
완전한 자기부인의 고백을 할 수 있는 자여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한 자들은 평생 어떤 삶을 살게 됩니까?
‘내가 왜 하나님의 말만 들어야 되니? 나에게도 힘이 있고 가능성이 있고 개척해 나가야 할 미래가 있다.
나는 충분히 자아 충족적이며 자가 계발이 가능한 자야’라는 교만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는 그러한 두 부류를 선명하게 갈라냅니다.
그 첫 번째 예가 가인과 아벨입니다.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양을 쳤습니다.
당연히 가인은 농산물로 제사를 지냈고 아벨은 양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은 피의 제사를 원하시기 때문에 양으로 제사를 지내지 않은 가인이 거절당한 것‘이라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에는 피의 제사와 함께 소제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건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이유를 단 한 마디로 이야기 합니다.
(히11:4)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 하느니라
뭡니까? ‘믿음으로’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어서’와 ‘믿음으로’의 차이입니다.
성경은 ‘아벨이 믿어서’라고 하지 않고 ‘아벨이 믿음으로’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놓치시면 안 됩니다.
‘믿어서’는 그 믿음을 발휘하는 사람에게 초점이 있는 것이지만 ‘믿음으로’라는 것은 믿음의 주인께서
그 믿음을 어떤 대상에게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는 그 믿음의 소유주에게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믿음을 당신의 백성들에게만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은 하나님의 믿음에 의해, 다른 말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의해 무상으로 하나님께 열납이 되는 제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는 가치가 없고 짐승으로 드리는 제사는 가치가 있다는 그런 공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자의 행위는 일차적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 행위가 무엇에 의해 격발이 되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나님의 믿음을 선물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어떤 목표지점을 향해 끌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벨이 양을 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육식을 하게 된 것이 언제부터입니까? 노아의 홍수 이후부터입니다.
(창9:3-4)
3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 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4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 것 이니라
그런데 창세기 4장에서 아벨이 양을 치고 있습니다. 먹지도 못할 양을 뭐 하러 칩니까?
양은 농사에도 도움이 못 되고 손만 많이 가는 짐승입니다.
(창4:1-2)
1.아담(아담אךםH120-H119-붉어지다,붉다)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 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헤벨הבלH1893=헤벨הבלH1892와동일-텅빔,없음,공허,덧없음,헛됨...)은
- 하발הבלH1891-행동,말,또는 기대가 ‘헛되다’..에서 유래
양(쩨온צאן צאוֹןH6629-이동하다,떼무리,어린양..)치는 자 이었고
가인은 농(아다마אךמהH127-땅,흙,토지..)사하는 자이었더라.
- (아담אךםH120-H119-붉어지다,붉다)에서 유래
심지어 아벨이 쳤다는 양은 히브리어 ‘쩨온’인데 그건 양 중에서도 어린양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왜 아벨이 먹지도 못할 어린양을 쳤을까요?
보세요. 하나님이 믿음을 부어준 자는 이 세상에서 약지를 못해요.
아주 비효율적이고 비경제적인 자로 밀려 내려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벨의 관심은 아버지 어머니가 입고 있는 옷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범죄 한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입혀 주셨지요? 그런데 그 옷이 어떤 옷이었습니까?
무죄한 짐승의 가죽이었습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의 문맥을 통하여 그 짐승이 어린양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 어린 양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생산되는 옷은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을 받은 성도는 바로 거기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힘을 내는 데에 필요한 먹 거리에만 몰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믿음을 선물 받은 아벨이 먹지도 못할 어린양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가리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열심으로 만들어 내시는 행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왕노릇이 우리를 그 자리로 끌고 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4절에서 믿음으로 아벨은 하나님께 의인의 대접을 받았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그의 예물로 증거 해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벨을 증거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벨의 예물을 증거 하셨다고 하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그에게 어린양이라는 예물을 바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벨이 자신의 의가 아닌 어린양이라는
제물에 의해 의인으로 취급을 받게 될 것임을 미리 증거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벨의 믿음은 하나님에 의해 준비되어서 부어진 것이지 아벨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를 어린양의 자리로, 예물의 자리로 밀어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벨이 부끄러움을 가릴 양의 가죽만을 바라보는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자들은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것에만 눈을 둡니다.
자신의 힘을 키우고 쌓는 먹 거리에만 집중을 합니다.
그들의 일상은 자신의 가치를 쌓고 위상을 높이는 데에 집중이 됩니다.
가인을 보세요.
자기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하나님께 화를 냅니다. 가인이 높은 겁니까? 하나님이 높으신 것입니까?
가인은 자기의 행위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 했고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가치 있는 행위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를 없애 버립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나는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로 덮어 주시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저는 혼돈이며, 공허이며, 흑암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나를 덮어주지 않으면 그렇게 멸망의 자리에서 영영 헤어 나올 수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라는 자기부인의 고백을 하는 자리로 내려가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 밖의 사람들은 혼돈과 공허 속에
자기가 세운 법을 집어넣고, 자기가 행한 행위를 집어넣어, 스스로 그 혼돈에 틀을 세우고, 공허를 메우며, 흑암을
밝히겠다고 열심을 부리는 자들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철저하게 부수어 가십니다.
일말의 가능성도 없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름판에서 돈을 잃은 사람에게 개평이라는 걸주지요? 그렇게 개평을 받은 사람이 그 돈 갖고 곱게 집으로 돌아가는 걸 보셨습니까? 결국 그것마저 다 잃어야 집에 갑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먼지만큼의 가능성만 있으면 그것으로 자아 성취와 자기실현을 이루려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도의 삶에 개입하셔서 다 털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아예 일어설 수도 없게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나에게서는 그 어떤 선한 것도 나올 수 없다’는 고백을 들어내시고야 마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야 하나님만 붙들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바울이 자신의 편지마다 ‘파울로스,’ ‘난 작은 자입니다’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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