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2. 25. 17:40ㆍ김성수목사님
118. “유사가 본질을 구축하는 형국”은유(metaphor),파타포(pataphor)
- 로마서 강해(4). “ 부르심을 받아 보내심을 받은 사도”본문기록...
‘왜 사람들은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그림 같다는 말을 할까요?’
언젠가 그림을 그리는 제자가 제게 했던 말입니다.
그림이 허상이고 풍경이 실제임에도 우리는 풍경보다 그림을 더 가치 있게 취급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유사가 본질을 구축하는 형국입니다.
무엇이든지 형식화 하여 ‘나’라는 나라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여 소유함으로써 오로지 자신의 나라를
살찌우는 데에만 총력을 기울이며 사는 인간들의 죄 성이 그대로 나타나는 그런 표현입니다.
인간들은 그렇게 혼돈으로 변화로 감지가 되는 것,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형식화하고 고정화하여
자신의 울타리에 가두어 거기에서 안정을 찾고자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거하는 장소를 우상화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매주 예배당에 오셔서 지난주와 꼭 같은 자리에 앉으시는 것이 바로 그러한 장소의 우상화,
장소의 고정화의 모습인 것입니다.
(녹취- 그자리에 앉으면 편안하고 바뀌면 굉장히 불안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혼돈속에서 자기 자신을 형식화 해서 자기 자신의 가치를 챙기고 그리고 변화가 감지 되면은요
금방 메타형식을 동원해서 수정을 가하고 그 변화 안에서 오는 차이 안에서 그 차이을
내 영광과 가치로 챙겨 갖습니다.인간들은 요
인간은 공간을 형식화 하고 고정화하며 우주를 자연을 형식화 하여
자기안에 캔버스 안에 도화지 안에 가둡니다.
그러한 형식화와 고정화…거기에서 말미암는 우상화는 인간의 천국개념에도 그대로 반영이 됩니다.
천국에 대해서 듣긴 들었는데 혼란스럽고 그 곳에 대해 잘 모릅니다
자신이 원하는 모양으로 천국을 형식화합니다.
여기 저기서 듣었던 좋은 것들은 전부 다 집어 넣어서 천국은 이럴거야하며 형식화 합니다.
도화지 캔버스안에 천국을 넣어 버립니다.인간은…
그리고 자신의 힘과 지혜,자신의 행위로 그곳에 들어갈려고 시도를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게 천국의 우상화입니다.그걸 기복신앙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내가 부자가 된다라는 것은 유치한 기복신앙이고
진짜 기복신앙은 천국을 자기가 형식화 해놓고 하나님 마저도 형식화하고
조작해서 놓고 그걸 내 힘으로 얻어서 끌어 댕길 수 있다라는 것을 믿는 것을 기복신앙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천국처소는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준비하시는 것이지
‘내가 너희의 처소를 준비하러 간다라고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가 준비하는 것이지 우리가 우리마음대로 형식화하고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기가 감당 할 수 없는 혼돈을 끊임없이 형식화하고 가둡니다.
그리고 그걸 대상화해서 안정감을 갖습니다.왜냐하면 그 건 이미 나에게 장악된 거기 때문입니다.)
(사5:8)
8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인간은 빈틈, 즉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늘려나가 땅 가운데에서
홀로 대장이 되어 살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화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 자리 고정화, 고착화의 삶을 추구하며 그곳에서 안정을 구하는 불안한 인간들의 본능적 죄 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천국도 자기들의 행위를 근거로 형식화 해 버립니다.
천국이라는 장소에 대해 듣기는 들었는데 거기가 어떤 곳인지 잘 모르니까 자신들의 행위를 근거로 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그런 곳을 그리며, 자신들의 힘으로 그곳을 쟁취할 수 있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그러한 제한과 형식화로 모든 것을 자기 존재를 살찌우려하는 인간들의 죄 성은 하나님마저도 성전에
가두려 하지요?
그 때 하나님은 ‘어찌 내가 인간이 지은 집에 가두어 질 수 있겠느냐?’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게 천국이라는 장소를 우상화하여 자신들의 행위로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고 형식화해 버리고 고정화해 버리는
인간들의 죄 성의 발현이었던 것입니다.
천국은 인간의 행위와 자격에 의해서 형식화 고정화 되지도 않습니다.
천국은 우리에게 포착도 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상상을 못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제안된 이성과 육신에 갇혀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포착합니까
그걸 어떻게 해석합니까
안된단 말입니다.그런데 그걸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겁니다.
그러나 인간의 형식화와 고착화의 노력은 역사 전체를 관통하며 인간의 보편적 특징으로 들켜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짜 실물의 풍경보다 그림이 더 가치 있게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풍경은 자기 안에 그림으로 형식화 되어 소유가 가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풍경은 내 안에 가둘 수 없어 버거운 존재가 되는 것이고 형식화시켜버린 그림이나 사진 속의 풍경이 더욱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모습이 아닐 수 없지요? 맞습니다.
그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건 엄밀히 말해 현실을 버거워 하는 인간들의 가상현실의 추구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인간들의 그러한 형식화와 고정화에서 비롯된 가상현실의 추구가
“천국에 대한 소망,혹은 이땅에서 하나님 나라 살기” 이런 멋진 이름으로 멋지게 둔갑하여
마치 훌륭한 신앙인의 지표로 삼아지고 있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함입니다.
제가 제자의 그 말을 들으면서 떠 올린 사람이 미디어 아트의 대가인 제프리 쇼였습니다.
현존하는 미디어 아티스트 중 최고의 찬사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현존하는 사람이지만 이미 미술사 책에
그의 이름과 작품이 기록이 되어 있을 만큼 그는 탁월한 작가입니다. 제프리 쇼는 아티스트라기보다
과학자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이제는 예술가가 과학자가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의 작품 ‘Legible City(읽을 수 있는 도시)’는 관객이 자전거를 타고 그의 작품 속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 방식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관객은 자전거를 타고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여러 도시를 구석구석 구경하고 탐험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짓궂은 관객이 자전거를 탄 채로 벽이라도 들이받을라치면 그만 몸이 벽을 통과해 버리고 맙니다.
그 사람은 순간 육체에서 벗어나 유령이라도 된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는 이내 자신의 신체가 작품 속에 있다는 현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자신의 신체의 현존을 자각하면서
그 사람은 자신의 신체로 돌아오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관객은 제프리 쇼의 작품 속에서 여행을 하면서 자기의 신체에서 벗어나는 체험을 하다가 다시 신체로 돌아오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신체와 현실을 벗어나서 가상의 공간을 체험하게 되는 것을 가상현실,
혹은 그보다 더 발전한 증강현실, 혹은 혼합현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미디어 아트를 상업용으로 사용하여 큰 성공을 이룬 것이 닌텐도 위(nintendo wii)입니다.
소비자가 게임기 속으로 들어가서 볼링도 하고, 테니스도 치고, 춤도 추고, 전쟁도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움직여 가며 가상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 운동도 하고 놀이도 즐기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한 첨단의 게임기가 탄생하게 된 단초 인물이 바로 제프리 쇼입니다.
제프리 쇼는 이제 21세기 이후의 인류는 pata physical species,
즉 과학과 은유가 뒤섞인 상태, 현실과 가상이 뒤섞인 상태를 사는 존재가 될 것이라 말을 했습니다.
그건 은유(metaphor)와는 조금 다른 것입니다.
포탄이 떨어지고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터가 현실이라면 장기판 위에서 장기 알을 가지고 이리저리 달리며 전쟁을 하는 것은 은유(metaphor)입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 장기판 위에서 작은 사람들이 진짜 전쟁을 하는 것을 파타포(pataphor)라 하는 것입니다. 헤리포터라는 소설 속에서 헤리포터 일행이 체스판 위에서 움직이는 체스 말들과 일전을 치르는 그런 장면을 떠 올리시면 이해가 쉬우실 것입니다.
루이스 캐럴이 그러한 파타 피지컬을 소재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는 소설을 쓴 것입니다.
이제 인류는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 혼합현실 속에서 진짜 현실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짜가 진짜가 되고 진짜가 실종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영화 메트릭스가 실제 우리의 삶 속에서 현실이 될 것이라는 거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인간이라는 종자들이 가상현실 속에서는 재미있게 즐기던 것을 현실 속에서 던져주면
손사래를 친다는 것입니다.
가상현실 속에서 열심히 몸을 이리 저리 움직여 가며 자동차 경주 게임을 하고 있던 남편에게 장거리 운전을 시키면 짜증을 냅니다. 가상현실 속에서는 밥도 안 먹고 심지어 밤까지 새면서 열심히 운전을 하던 사람이 현실 속에서 운전대를 쥐어 주면 짜증을 낸단 말입니다. 가상현실 속에서 열심히 적군을 찾아 방아쇠를 당기던 아이에게 군대 영장이 나오면 어금니를 뽑던가, 팔을 뽑던가, 검지 손가락을 자르면서까지 군 면제를 받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인간들은 그렇게 진짜 현실에서는 자꾸 탈출을 하고 탈주를 하려하고 가상의 현실 속으로 숨으려 합니다.
그러한 현상은 제프리 쇼의 예언처럼 21세기 이후에 나타날 현상이 아니라 이미 아담 안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이 그때부터 살던 삶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차압당한 뒤, 저주 아래에 놓여진 이 세상에서 pata physical species로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이 세상의 현실이 인간들에게는 버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역사와 현실을 형식화하고 조작을 하여 그 속에서 안정을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들의 추구는 그들의 마음속에서도 들켜집니다.
조금 더 나아가 볼까요? 지금 여러분 가슴 속에 곱게 감추어둔 그리움이나 추억을 하나씩 꺼내 보세요.
너무 아름답고 가치가 있지요?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게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인지 몰랐잖아요?
그래서 더 아련하고 아쉽고 그런 거지요?
그 말은 그러한 그리움이나 추억이 지금 이 순간 여러분에게 현실로 주어진다 해도 여러분은 그때와 똑같이
그 순간을 가치 있게 여길 수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리움에 울고 추억 속에서 아파합니다.
실제로 그립고 그립던 것을 진짜 현실 속에서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정말 그렇게 좋던가요?
그리고 그 좋음이 얼마나 지속이 되던가요? 왜 인간은 그리움이나 추억을 현실보다 더 크게 가슴 속에 인식하게 되는 것일까요? 역시 자기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경험을 형식화하고 고정화 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움과 추억은 항상 현실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지금 현실속에서 그 상황과 현실이 가장 소중합니다.
그 그리움은 속이는 것이며 여러분이 조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 세상은 아담의 타락이후에 하나님의 저주 아래 던져졌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사망으로 치닫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현실 속에서 늘 사망의 증상들을 접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로 가시와 엉겅퀴만 내는 땅의 현실과 질병과 늙음과 변화와 혼돈이라는 썩어짐의 과정들을 목도하면서 인간들은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림 속의 풍경에는 나타나지 않는 벌레와 진드기와 송충이와 짐승들의 배설물을 현실 속에서는 눈으로 확인하고 경험을 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진짜 풍경보다 그림이 더 좋은 것이고 진짜 현실보다 가상의 현실이 더 좋은 것입니다.
결국 인간들이 자꾸 가상의 현실에 더 가치를 두고 그 가상과 유사 속으로 숨으려 하는 것은
더러운 죄와 죄의 증상들과 결과물들이 현실 속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것들을 다 치워버리고 털어버린 뒤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들로
형식화 해버린 가상의 그림과 가상의 현실 속으로 수시로 도망가 버리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들이 그렇게 자기들이 조작하고 형식화 해 놓은 세상을 진짜로 착각을 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본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각자가 상정한 가짜 세상을 살면서 엉뚱한 상을 보며
사는 것입니다.
그걸 성경이 ‘눈이 멀었다, 소경이다, 어두움 속에 산다’라고 합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빛이 찾아오는 것을 부르심이라고 하고 그것을 다른 말로 구원이라 합니다.
어두움 속에서 진짜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들이 형식화 하고 조작한 혼합의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빛이신 예수가 찾아오셔서 눈을 열어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로 내 동댕이쳐 버리는 것입니다. 게임 그만하고 현실을 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렇게 눈이 열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제일 먼저 들어오게 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죄입니다.
인간들은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들 스스로 ‘신’이 되어 버린 후에 자신들의 가치를 챙기기 위해
자신들의 더러움과 그들이 집단적으로 배설해 놓은 더러운 오물 같은 역사를 선하고 아름답게 위장하기 바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역사 낙관론이니 역사 진화론이니 너스레들을 떨면서 신이 된 인간의 위상을 한껏 찬양하며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어떤 무리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은혜가 떠난 피조 세계의 실상을 똑바로 바라보게 하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입에서 ‘아멘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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