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그 하늘의 하나 됨이 어떠한 메커니즘에 의해 성취가 되는 지 ”...

2014. 8. 10. 10:06김성수목사님

130.“ 그 하늘의 하나 됨이 어떠한 메커니즘에 의해 성취가 되는 지 ”...

- 로마서 (30)

“지붕을 세우고 당을 짓는 자들, 지붕을 벗기고 흩으시는 하나님(I) ”본문기록...

 요한복음 17장으로 가면 그 하늘의 하나 됨이 어떠한 메커니즘에 의해 성취가 되는 지 잘 나와 있습니다.

(요17:21~23) 21.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되게 하려 함 이니이다

23.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에 의해 주도 되어지는 진짜 하늘의 하나 됨, 하늘의 당 짓기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마음속으로 그림을 그려 보세요. 23절을 보시면 그 메커니즘이 이러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성도 안에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맨 바깥쪽에 있고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그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형국입니다. 그런데 21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신다고 하지요? 그러면 그림이 조금 달라집니다.

성도가 맨 바깥쪽에 있고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신데 그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은 분이십니다.

서로 안에 들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같은 존재라는 것이니까요. 조금 간단해 졌지요? 성도 안에 하나님이신 예수가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새로운 피조물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부릅니다.

 (고후5:17)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러면 그림이 어떻게 되지요?

 맨 바깥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 안에 성도가 있고 그 안에 다시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 있는 그림이 되지요?

 그러니까 성도는 안팎으로 예수에 의해 포위가 되어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성도라는 존재가 스스로의 주체성과 존재성을 챙길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안에서 존재가 되며 그 속도 예수로만 채워져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늘 백성은 스스로 별도의 존재성이나 독자적 영역을 챙겨 가질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머리로 한 통일체, 하늘의 한 몸인 것입니다.

 그 한 몸의 현실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과 예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한 몸이라는 통일체로 묶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방법 이외에 피조물이 하나님과 한 몸이 되고, 횡적인 한 몸의 현실 속으로 들어갈 방법은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한 몸으로 연합이 되어 하늘 백성이 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역사 속에서 점점 맥없이 죽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내가 자랑할 것은 십자가밖에 없습니다.’하고 최후의 항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자랑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밖에 없다는 것은 기실 ‘난 죽은 자가 맞습니다.’라는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그들이 점점 세상의 가치를 놓는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세상이 죽은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고 세상에게는 성도가 죽은 자처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목숨을 걸고 붙들고 있는 세상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게 보이거든요. 그걸 바울이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갈6:14) 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 하니라

 (표준 새 번역) 14.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서만 비로소 산 자가 될 수 있는 그런 무력한 존재들입니다.

여러분은 그 은혜를 찬송하는 이로 살다가 가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수고와 노력과 행위로 지붕을 얹고,

우리 힘으로 기특한 행위를 만들어 내어 하늘에 도달해 보겠다는 그런 인간들의 당 짓기는 다 부질 없는 짓입니다.

 성도는 성숙되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있던 자들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발견 되어지는 것을 굳이 성숙이라 표현을 한다면 백보 양보해서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서는 그 어떤 모양의 선도 나올 수 없습니다.

‘시간이 가면 변하겠지? 시간이 가면 성숙 되겠지?’ 그런 말씀 마세요. 시간은 객관적 실체가 아닙니다.

 시간은 관념이요 허상입니다. 시간은 인간들이 사건들을 하나하나 숫자로 세면서 만들어낸 허상입니다.

그런 면에서 시간이라는 것은 어떤 행위자의 행위가 실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흔적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아침밥은 무엇이고 점심밥은 무엇이고 저녁밥은 무엇입니까?

각각이 다른 밥이며 다른 행위인가요? 다 같은 밥이며 다 같이 먹는다는 동일한 행위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침밥, 점심밥, 저녁밥 하면 그 속에 시간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아 보이지요? 아닙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밥을 먹는 행위자의 행위의 흔적일 뿐인 것입니다. 그걸 인간들이 숫자로 세어 놓은 것이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이 자연과 우주의 변화는 시간에 의해 변화하고 성숙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행위자가 일을 하신다는 증거가 흔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걸 인간들이 시간이 간다, 시간이 흐른다, 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와 성도의 탄생이라는 하나님의 일은 이미 창세전에 완료가 되어 있습니다.

시간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타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시간만 주면 내가 뭔가 성숙되고 변화 되어진 모습을 보여 주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걸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손대셔서 하나님이 완성하시는 존재이지 스스로의 됨됨이나 스스로의 살아있음에 조금도 기여를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걸 알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시간이 갈수록 변화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이 되어 있는 자신을 은혜 속에서 발견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한 것이 신앙생활이라면 자신의 신앙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성숙의 모습이나 변화된 모습을 가지고 무엇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다 완성해 놓으신 것을 발견하는 것일 뿐인데 뭘 자랑해요?

오히려 그렇게 하나님의 손으로만 완성시켜 내야 하는 자신의 처음자리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번쩍 손을 드는 항복의 고백을 하는 게 맞는 것입니다.

그걸 ‘죽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으시면 됩니다. 다른 거 없어요.

지붕 만들어 인간들의 자존심 챙기려 하지 마시고 지붕을 벗겨 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손길에 자신을 맡기세요.

그리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된 자신의 현실을 찬송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