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존귀(티메τιμήG5092),참고‘카스(καθ) 휘포모넨(ὑπομονην)’

2014. 10. 28. 22:03김성수목사님

] 서울서머나교회 131.“존귀(티메τιμήG5092),참고‘카스(καθ) 휘포모넨(ὑπομονην)’ ‘선을 행하여’ ‘에르곤(εργον) 아가돈(άγαθόν)’”... - 로마서 (29)“인과응보의 하나님?”본문기록... 여러분, 정말 여기에서 말하는 선을 행함이 그런 종류의 것일까요? 그래야 이 세상에서든 천국에서든 상을 받게 된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 맞나요? 아닙니다.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의 행함에 의해 미래의 ‘되어질 나’를 보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미래의 되어질 ‘나’를 이미 확보하고(상태로) 이 세상에 온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한 인과응보의 신학을 주장하고 가르치는 자들은 동양 철학의 영향을 받아 엉터리 신학을 제조하여 투여하고 있는 그러한 자들인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너무 목적론적이고 결정론적이어서 기독교의 현실성을 강조하느라 그런 예화를 들었다는 변명아닌 변명의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는데,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그러한 신앙의 현실성을 독려하는 위해 그렇게 교훈적 설교 권선징악의 설교를 하는 건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로 진리를 막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 분은 간과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말씀의 진의는 무엇인가?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항상 문맥 속에서 이해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까지 공부한 내용이 무었습니까? 성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의해서만 살아나는 자라는 로마서 전체의 대 주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남을 판단해서도 안 되는 것이고 남을 평가해서도 안 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다시 2장 1절 이하를 보겠습니다. (롬2:1-3)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줄로 생각하느냐 여기에 어떤 행함이 반복하여 지적되고 있지요? 못 된 행함입니다. 어떤 행함입니까?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행함,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행함입니다. 여기에 이어지는 것이 오늘 본문 6절인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 안의 못 된 유대주의를 지적한 다음, 그러한 행함은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것이라고 5절에서 경고를 한 후 6절에서 그러한 행함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보응이 있을 것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6절은 ‘착한 일 많이 해, 안 그러면 하나님이 벌주신다.’는 식의 권선징악의 교훈을 적어 놓은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으로 함부로 사람 판단하는 거, 그거 안 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7절과 8절에서 다시 그 못 된 행함과 선한 행함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7절을 보세요. (롬2:7-8)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티메τιμήG5092)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7절에는 영생을 보응으로 받게 되는 선을 행함이 나오고 8절에는 노와 분으로 보응을 받게 되는 악한 행함이 나옵니다. 그런데 영생으로 보응을 받게 되는 선한 행함은 어떤 행함입니까?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행함입니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게 뭘까요? 그게 선을 행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잖아요? 영광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독사’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이 보이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또 그 예수님이 들어나는 우리를 영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건 성경에서 곧잘 사람의 영광과 대조되어 나오는 그러한 영광입니다(요12:43). 그리고 존귀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티메τιμή’는 ‘대가, 지불된 돈’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전6:20) 20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존귀)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여기에서 ‘값’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오늘 본문의 ‘존귀’라고 번역이 된 ‘티메τιμή’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대충 감이 잡히시지요? 하나님의 영광을 품고 육신을 입고 내려오셔서 죄인들의 값으로 치러지신 존귀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썩지 아니함이 함께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썩지않음은 하늘의 하나님이나,하나님나라,예수그리스도와,그 안에서 부활하게 될 성도를 가리킬때 사용합니다.하늘의 것을 가리킬때 자주 쓰이는 단어입니다.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보면 우리가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이 하는 것으로 우리가 다시 부활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자주 함께 쓰곤 합니다. (딤전1:17) 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존귀와 영광과 썩지 아니함이 누구를 가리킵니까?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한군데 더 보지요. (벧전1:23)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우리 성도가 거듭난 것이 무엇으로 된 것이라 합니까?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그 썩지 아니할 씨가 무엇인가 하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입니다.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영생으로 보응을 받을 사람들은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않음의 ‘하나님 나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그런행함’을 보이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그것이 선한행함입니다. (녹취)그런데 영광과 존귀와 썩지않음을 구하는 것은 썩을 것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전제 가 되어야 합니다.그게 세상의 부인이며 자기자신에 대한 부인 인 것입니다. 그래야 그걸 바로보게 됩니다. 그래야 믿음이 생길 게 아닙니까 아에 어서 가야지 거기가 정말 좋은 곳이지 그곳에서 내가 입을 옷이 진짜 옷이지 이것이 영광과 존귀와 썩지않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의 전제는 반드시 이세상의 삶이 우리가 나그네요 이방인으로 잠시살다가 어떤것을 교훈 받은 후 가는 어떤 그러한 가치 없는 것(가치없다고 해서 세상을 막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늘의 영과과 비교해서 그런다는 겁니다) 그러한 것을 아는 것이 전제되는 것입니다.그것이 자기부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아는 이들이 세상에 대해 죽었다라고 하는 것이고 그들에 대하여 세상이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생으로 구원을 받을 사람들은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않음에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자들이고 그들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만을 의지하는 자들이 남을 함부로 심판,정죄해 버릴 수 있느냐는 행간의 메시지를 여러분은 읽으실 수 있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 7절의 ‘참고’는 누구의 참음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예수의 참음입니다. 일차적으로... 다시 7절 앞부분을 보세요. (롬2:7) 7 참고(휘포모네ὑπομονήG5281) 선을(아가도스άγαθόςG18) 행하여(엘곤ἔργονG2041) 여기에서 ‘참고’라고 번역이 된 ‘카스(καθ) 휘포모넨(ὑπομονην)’은 지속적인 인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중간에 끊어지지 않는 인내, 계속적인 인내, 그건 인간의 것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카다κατάG2596’라는 전치사도 ‘according to'라는 의미의 전치사입니다. 그 부분을 직역을 하면, ’지속적인 오래 참음에 의해 선을 행하게 되는 자가 있는데‘입니다. 그 지속적인 오래 참음이 누구의 것인지 잘 나타나 있는 곳이 우리가 조금 전에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않음‘이라는 단어를 찾아내었던 디모데전서 1장 17절 바로 앞에 나옵니다. (딤전1:16)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누가 일절 오래 참으신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일절 오래 참으신 것입니다. 그 분이 일절 오래 참으시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심으로 믿는 자들이 영생을 얻게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으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녹취)거기서 성도의 참음이 격발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참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참음에 의한 피동적인 참음이요 필연적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아서 우리를 구원해 내셨습니다. 구원해 내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역사를 살아가면서이 완료지점으로 가게 되는데 그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이미 완료된 이미 구원된 그 자리로 우리가 이 인생과 역사를 과정으로 걸어가고있는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중도에 끊어지거나 실패하거나 좌절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구원해 놨기 때문에 오래 참으심으로... 성도의 참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견인 성도를 그 자리에 반드시 끌고 가시기 때문에 성도는 중간에 좌초 될 수 없습니다.끝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참음은 하나님의 참음에 의해 주어지는 되는 그냥 일상의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아있는 자체가 참음인 것입니다. 어금니 꽉 물고, 주먹 불끈 쥐며 결단하는 그게 참음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살아있는 자체가 참음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는 것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 인내하는자 끝까지 견디는자 끝가지 이기는자 이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열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격발이 될 수 밖에 없는 필연적 성도의 인생입니다. 그게 오래참음입니다. 그 참음에 의해 우리의 삶에 참음이라는 삶이 허락되는데 그 참음이라는 삶이 어떤 삶이냐면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않이함을 구함을 다른 말로 나의 존재와 이 세상의 허무함을 깨닫게 되어지는 자기부인의 그 부인의 그 삶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착하게 살어,좋은 일 많이 해야 돼 안 그러면 다 죽일거야 이런 말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복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나 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 7절은 일차적으로 예수의 행함인 것이고 그 예수의 행함에 의해 예수를 믿게 되는 성도의 수동적,필연적 행함을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선을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선을 행하여’라고 번역이 된 어구가 헬라어 ‘에르곤(εργον) 아가돈(άγαθόν)’인데 그 어구는 여러분이 여러 번 공부를 한 어구입니다. (빌1:6) 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여기에서 ‘착한 일’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오늘 분문의 ‘선을 행하다’와 정확하게 같은 단어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그 ‘착한 일’의 주체를 ‘하나님,예수님’으로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 착한 일은 성도 안에서 일어나는 새 창조,구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단어는 창세기의 첫 창조의 매 날에 후렴구처럼 붙어 있던 ’보시기에 좋았더라의‘토브טובH2896’를 바울이 인용해다가 쓴 것이라 했지요? 그러니까 우리 안에서 시작된 착한 일은 우리가 행하는 어떤 일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 하나님의 행하심에 의해 우리에게서 나타나게 되는 증상을 ‘선을 행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뭡니까? 믿음이지요. 바울이 그 믿음을 가리켜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함이라고 묘사를 한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로 받아 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서에서 여러번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선한행함과 믿음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어찌 있을 수 있니 라고 한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착한일 안하면 다 너희들 가짜다 이런 말이 아니라 믿음과 행함은 같은 이야기 인데 너희는 믿음을 이야기 하면서 엉뚱한 행함을 이야기 하고 있구나 이게 유대주의에 대한 일갈인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 믿음이 있는 데 왜 착한 일 안해 이야기가 아닙니다. 믿음은 그 자체가 행함입니다.믿음이라는 행함 너희 행위와 가치를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을 의존하는 것이 행함인데 너는 왜 다른 착함을 갖고와서 이게 믿음이라고 이야기해 이 이야기 하는 건데 동양철학의 영향을 받아가지고 기독교신앙으로 가지고 와서 믿음이 있는 자가 착하게 안 살어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행10:38)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착한 일을 누가 하세요? 예수가 하십니다. 그 예수의 착한 일에 의해 하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착한 일이요, 교회의 착한 일인 것입니다. 선한 행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