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소망, 엘피스έπίς

2015. 11. 4. 17:43김성수목사님

175.소망, 엘피스έπίς

- 로마서(90)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나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

     강해말씀기록...

 

(롬8:19~25)

19 피조물의 고대 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마찬가지에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소망, 엘피스έπίςG1680라는 단어가 똑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란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하늘의 묵시를, 나타난 형상과 인식가능한 법칙과 원리 속에 넣어서

크로노스(χρόνοςG5550) 세상 속에서 이렇게 세워 두세요.

그걸 믿음이라고도 하고 소망이라고도 해요.

그런데 그것을 나타난 모양으로만 인식을 해버리면 그건 소망이 아니라

크로노스(χρόνος)의 현실이 되어 버린단 말이에요.

그 안에 하나님은 어떤 뜻을 담아 메시지를 담아 주셨는데, 그걸로 진리를 깨닫는게 아니라

이걸 그냥 그 현실로만 내가 확 받아들이면 나의 희로애락은 그것에 의해 결정된다니까요.

그걸 세상에 묶였다 라고 하는 거에요.

우리는 거기에서 풀려나길 오매불망 하는 사람이라면서요. 이거 딴 사람 이야기에요? 이거는?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로마서 8장은? 우리 이야기라면서요.

그러면 우리도 거기에서 벗어나기를, 풀려나기를 자유에 이르기를,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에 이르기를 우리도 오매불망하고 있어야 된다 이말입니다.

근데 그 오매불망이 내가 부정되고 부인되어지는 길이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아들로 낳아지는 과정이기 때문에 쉬노디노(συνωδίνωG4944), 해산의 고통이야 라고

                           -쉰(σύνG4862:결합의 의미,합께,동참,교제,소유등)

                              +오디노(ώδίνωG5605:해산의 고통을 겪다)에서 유래:함께 고통을 당하다등

                                 ;오딘(ώδίνG5604:고통,해산의 고통)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렇게

껍데기가 벗겨지고 진의로 밝혀지는 그거는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야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는 나타난, 보이는 소망으로 보이지 않는 그 소망이라는 그 내용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재해석해야 되는 거에요. 보이는 소망을.

 

(히11:3 )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이제는 믿음으로 이거를 내가 확실히 믿었으니까 이렇게 안 볼수 있게 되었죠?

믿음으로, “아 나타난 이런 것들로 그것으로 내가 그 진리를 알고 나니까

이 나타난 것들로(믿음으로)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은 말씀을 담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았다” 라는 거에요. 믿음으로 소망으로 알았다는 거죠.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게 아니네 이렇게. 무엇으로 알아요?

믿음으로 알아요.

그냥 가만히 있는데 알아지는게 아니라. 끊임없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심으신 다니까요.

심지 않은데서 거두지 않습니다.

예수를 심어서 우리를 낳게 하는거에요.

반드시 심으세요.

끊임없이 심어주세요. 말씀의 씨를 계속 던지신다니깐요.

근데 여기서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된게 아니다’ 라고 했을 때

“나타나다” 고 번역이 된 퐈이노(φαίνωG5316) 라는 단어가

나타내다, 밝게 빛나게 하다. 빛을 비추다

이런 말이에요.

히브리서로 바꾸면 오르(אורH215) 라는 뜻이에요.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에서의 그 빛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으세요?

보이는 건 그 빛이 아니래요. 그 빛이 재료가 아니라는 거에요.

그게 뭔지는 조금 이따가 원문을 갖고 설명을 해드릴게요.

지금은 그냥 보이는 모든 건 하나님의 그 진리,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이다 라는

히브리서 기자의 진술만 기억해 두세요.

(요1:3 )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는 말씀입니다. 앞에서 그가 말씀이다 이래놓고 그 로 받아요.

말씀이 없이는 된 것이 없다 이게 기노마이(γίνομαιG1096) 에요.

말씀이 형체로 되어졌다 이런 말이에요. 말씀이 되어졌다 라는 건 그러면 그 되어진 형상은

전부 말씀이라는 내용을 갖고 있다는 뜻이죠? 그런 말이에요.

하나님이 말로 창조했데, 재료도 없었데 이런 말이 아니라 나타난 그것들, 되어진 그것들은

말씀이라는 내용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 그 어느 것도 우발적으로 생겨난 게 없다는 거에요.

“여러분의 인생 속에 모든게 다 마찬가지야, 코 끝에 여드름 나는 것도 마찬가지야”

모든 것에 의미가 있다 생각하셔야 되요.

자, 그렇게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인 거고

그들은 그 보이는 것을 믿음으로, 소망으로 받아서 구원에 이르게 된 사람들인 거에요.

그들은 소망으로 구원을 받은 이가 되는 거죠.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 라고 한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네, 소망으로 받았어요. 그러나 보이는 그 소망은 그 소망은 아니지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에요.

엘피스έπίς, 소망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용례를 찾기 위해서

제가 헬라어 신약성경을 아람어로 바꾸어 놓은 아람어 신약성경을 찾아봤더니

그 소망이라는 단어가 티크바(아람어)로 나와있어요.

헬라어는 반드시 그 진의를 가리기 위해서는 아람어나 히브리어로 바꿔서 봐야 되요.

그런데 제대로 번역된 것을 찾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그래서 제가 찾고 찾다가 하나 찾았는데

너무 비싸 가지고 살까말까 하다가 사가지고 지금...^^

티크바(תּקוהH8615) 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굉장히 많이 등장하는 단어인데

그 티크바라는 단어를 추적해서 올라가면 카바(קוהH6960) 라는 단어까지 올라가게 되요.

그 단어가 묶다, 모으다, 대망하다, 참으면서 기다리다(인내죠? 이거)

그 뜻이 그 단어 안에 다 들어 있어요. 소망이라는 단어 안에요.

인내, 꽁꽁 묶임, 열망 이게 다 들어가 있는 거에요. 그 흐름 안에요.

따라서 보이는 소망으로 보이지 않는 소망을 보지 못하면 그 보이는 소망에 묶이는 것이고요,

다시 보이는 믿음으로 그 믿음을 알지 못하면 나는 믿고 있다 라는 거기에 묶여 버리는 거에요.

천만에요. 그 사람 믿는 거 아니에요. 신념이 강하다 라고는 이야기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걸로 구원 못 받습니다. 그런 기질이 있는 사람이 있어요.

한번 꽂히면 끝까지 가는거. 그건 기질이에요. 믿음이 아니라.

그렇게 보이는 소망으로 보이지 않는 소망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보이는 소망에 꽁꽁 묶이게 되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보이는 소망 속에서 보이지 않는 소망을 대망, 열망해야 되는 것이며,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휘포모네(ὑπομονηG5281), 인내인 거고

            -휘포메노(ὑπομένωG5278)에서 유래;밑에 머무르다,남겨지다,참다,인내하다등

           : 휘포(ὑπόG5259-아래)+메노(μένωG3306-거하다,머물다,남아있다등)에서 유래

그 보이는 것에서 풀려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사는 자가 진짜 소망으로 사는 자다 라는 거에요.

그걸 그 단어의 문자의 흐름이 전부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성경의 문자들을 공부하면서 추적해서 올라가보면

그것들이 전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진술을 하고 있어요.

단어하나 문자하나가 다.

그 단어는요. 파카흐(פקחH6491) 라는 단어로 연결이 되는데

소망이라는 그 단어가 눈을 뜨다, 열리다, 현명하게 되다 이런 뜻이에요.

그 소망으로 보이지 않는 소망을 아는 게 눈을 뜨는 거고 감옥 문이 열리는 거고

그게 풀려 나는 거레요.

그리고 그 단어를 반복해서 페카흐(פקח) 코하흐(קוח) (H6495)라고 쓰면

그게 구원이라는 단어에요.

감옥에서 풀려남. 구원. 이거를 그 소망이라는 그 단어를 반복해서 써서 표현을 해버린다고.

구원이에요.

그러니까 소망이라는 건 구원, 풀려남, 눈을 뜸 그걸 목적으로 하고 있는 거고 그 소망은 반드시

그 구원, 풀려남, 자유, 눈을 뜸 을 열매로 낳게 되어 있어요. 그게 진짜 소망이라면.

근데 이땅에서 그걸 미리 끌어당겨서 내 삶속에서 살지 못하고 미래의 어느 날 되어질 어떤 것을

소망하는 건 소망도 아닐 뿐만이 아니라 그것으로는 절대 풀려남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 소망이라는 단어의 어근 카바(קוהH6960) 에서 파생되어서 티크바(תּקוהH8615) 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단어가 미크베(מקוהH4723) 라는 단어인데 역시 소망이에요.

막 혼용해서 써도 되는 단어인데 그 단어가 처음 등장한 곳을 제가 소개해 드릴게요.

 

(창 1:9~10)

9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카바(קוהH6960)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미크베(מקוהH4723) 물을(마임מיםH4325)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요,

첫째날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둘째날 궁창 위의 물, 아래 물로 나누시고

셋째날 아래의 물과 뭍을 나눈 다음에

그 모인 물, 바다를 미크베(מקוהH4723) 마임(마임מיםH4325), 소망의 물이라고 그렇게 썼어요.

왜 그럴까요? 여러분.

창세기 첫째날 빛과 어두음으로 나누어지죠?

이게 나눈 다 라는 것도 이게 쭉 너는 껌껌한거 해 너는 밝은 거 해 이렇게 나누었다는 말이 아닌데

조금 있다가 설명해 드릴게요.

둘째날은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갈라요. 위에 물이 있다 라는 게 아니에요.

저기 어디 찢어지면 큰일난다, 물쏟아진다 가 아니라 그 진리를 아래의 물로 설명해 주기 때문에

그걸 그냥 위의 물이라고 하는 거고 그거를 요한계시록에서 유리바다 라고도 표현 하는 것이며,

근데 그 물은 아니다 라는 의미에서 바다도 다시 있지 않겠고 라고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러면 유리 바다 는 뭐냐고? 깨끗한 물 이란 뜻이에요.

유리라는 그 단어가 욥기에 제일 먼저 쓰였는데 ,욥기가 창세기 시대인데

그 때 유리가 어디에 있어요~ 없단 말이에요.

그 물을 갈라서 위의 물, 아래물로 갈라요.

아래의 물로 반드시 위의 물로 알아야 돼, 이 바다로 반드시 그 진리가 뭔지 알아야 돼,

이 바다는 아까 우리가 공부한 아래의 형상으로 준 믿음, 소망의 그 형체들 있죠?

여기 안에 성경, 성전, 세상, 예수, 나, 육신까지 다 들어가는 거에요.

이것으로 이걸 알면 되요. 그러면 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이 물이 바다를 덮으면 어떻게 되죠?

그게 하나님의 뜻이야 라고 독사조(δοξάζωG1392) 드러나면 그걸 하나님의 영광이라 그래요.

그러면 삼일째 되는 날은 어떻게 되냐면 이 아래의 물을 뭍과 갈라요.

이거는 이 아래의 물이 하나님의 그 위의 물, 그 진리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써버리면

이 물은 반드시 물러가고 하나님의 땅인 뭍만 남는다는 언약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런 대조의 개념으로 보지 않고 이 물을 진리의 물로 보게되면 어떻게 되냐면요.

하나님의 뭍이라는 단어 이자체가 물이 없다라는 뜻도 갖고 있거든요. 물이 없으면

그건 사막, 광야 죽는 거에요. 저주에요. 근데 이 아래의 물이 위의 물로 이해가 되어서

이 위의 물, 진리가 이 땅을 적셔주면 그것이 진리가 되는 거야 라는 약속도 (사실은 똑같은 말이에요)

갖고 있다 말이죠. 그러면 이 아래의 물이 위의 물로 이해되어져서 이땅에 물을 댈수가 있으면

그건 미크베(מקוהH4723) 마임(מיםH4325), 소망의 물이죠.

그러니까 여러분 함부로 아래 거, 어두운 거 이런 건 나쁜거야 라고 이야기 하시면 안됩니다.

나쁜게 뭐에요? 도대체가요. 하나님이 나쁘고 좋은거, 선하고 악한 거 이런걸 갖고 우리를 판단하고 세상을 판단했다면

여러분 이 세상은 존재하면 안되요.

하나님 앞에서 형체를 가진 모든 건 악한 거라 그래요. 성경이.

성경이 죄, 어두움, 악 이런 거는 다 뭐냐면 위의 것이 아닌 아래 거, 그러나 그것을 설명하는

어떤 거, 그런데 이것이 그것을 설명하지 못하고 아랫것으로만 이해되어지고 인식되어질 때

이걸 악, 죄, 어두움, 세상 이라 그래요.

근데 이것이 그 진의대로 밝혀지면 이게 왜 나빠요? 어두움으로 빛을 알아, 물로 위의 물을 알아,

세상으로 하늘을 알아 그랬을 때 “이게 그거네요” 라고 알면

하늘과 땅이 그 뜻이 땅에서 이루어져 연합이 되는 걸 창조 라고 그래요.

그러면 그 상태가 뭐에요? 악이, 어두움이, 이 세상이 그걸 설명하고 있는 거였어요?

그러면 이걸로 내가 그걸 알았다면 이 아래의 거, 어두움, 악 이거는 나를 어떻게 심판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게 아니네요. 라고 알게 되었을 때 그걸 ‘용서’

이렇게 아래의 물, 모인 물이 왜 미크베(מקוהH4723) 마임(מיםH4325 소망의 물이 되는지 이제 아셨죠? 여러분.

따라서 우리는 믿음과 소망으로 진리를 깨달아서 사랑으로 완성하면 되는 거에요. 그렇죠?

그러니까 우리가 그 아래의 것, 믿음, 소망 이런 걸로 그 아가페의 그 사랑, 그 진리를 알았다면

더 이상 껍데기로서의 그 믿음과 소망은 우리에겐 필요가 없잖아요.

그래서 그중에 최고는 아가페지(άγάπηG26) 라고 이야기 하는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