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70이레에 대해 개괄적인 이해

2015. 9. 25. 22:55김성수목사님

168.70이레에 대해 개괄적인 이해

- 사사기(11)왜 찬송해야 하는가?강해말씀기록...

 

우선 70이레에 대해 개괄적인 이해를 좀 하셔야 합니다.

이레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한 주간, 즉 7일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70이레 하면 490일이 되겠지요?

그런데 예언서의 날짜 계산은 하루를 1년으로 계산을 합니다.

따라서 천사 가브리엘의 예언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490년 이후에는 역사가 종결이 된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되었나요? 거기에 대한 대답은 잠시 후에 해 드리겠습니다.

아무튼 490년, 70이레는 우리가 레위기 26장에서 확인한 것처럼

70년 포로 생활을 통한 7배의 징책 기간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대항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칠 배로 징책 하실 것이라 하시고

70년 포로 생활로 밀어 버리시잖아요?

그런데 천사 가브리엘이 그 70년 포로 생활을 70이레로 다시 풀어 주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70년 포로 생활이 담고 있는 것이 이스라엘이 칠 배로 징책을 당하는 현장,

즉 죽도록 두들겨 맞는(벌이 칠 배)현장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70년 포로 생활은 70이레의 축소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70년 포로 생활이 왜 발생한 것이지요?

이스라엘에 약속의 땅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안식년은 물론이요, 희년도 지키지 않고

땅을 혹사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70이레, 즉 이 인류의 역사는 무엇이 폭로되는 현장이라는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완료하신 약속의 실체를 모르는 자들이 세상 권세 잡은 자의 종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현장을 폭로 당하는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바벨론에 인자의 모형인 다니엘이 투입이 되고 그가 바벨론에서 죽고,

이스라엘이 풀려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령은 어느 때에 누구로부터 주어진 것입니까?

그것이 규명이 되어야 70이레의 시점을 알 수 있잖아요?

예루살렘 성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세 차례에 걸친 침공에 의해 완전히 불타서 폐허가 되었습니다.

바벨론의 1차 침공이 BC605년이었고 2차 침공이 BC597년입니다.

그리고 BC586년에 3차 침공을 하면서 예루살렘 성전과 예루살렘 성 전체를 완전히 초토와 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다가 바벨론이 BC538년에 고레스에게 망합니다.

그 고레스의 나라가 메대와 바사입니다.

그가 BC537년에 이스라엘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서 성전을 재건하게 합니다.

이 때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중심으로 약 5만 명이 귀환하여서 BC 516년에 성전이 재건됩니다.

그걸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예루살렘 성이 중건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중건이 되고 성전 예배가 다시 회복된 때는 BC457년 2차포로 귀환 때입니다.

그때의 페르시아 왕이 아닥사스다입니다.

성전은 고레스가 재건하라고 했고 성은 아닥사스다가 중건하라고 했습니다.

그게 에스라서에 나옵니다.

 

(스7:11~13)

11 여호와의계명의 말씀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의 학사인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아닥사스다 왕이 내린 조서 초본은 아래와 같으니라

12 모든 왕의 왕 아닥사스다는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13 조서하노니 우리나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저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뜻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너와 함께 갈 지어다

 

그렇지요? 요 때가 바로 BC457년 아닥사스다 왕 7년 때인 것입니다.

다니엘서 9장의 70이레의 시작은 바로 여기입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 중건이 시작되어서 정확하게 49년 뒤인 BC408년에 예루살렘 성이 완전히 중건이 됩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난 뒤 49년 만에 거룩한 성이 완전히 중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 49년 동안 에스라와 느헤미야 같은 선지자들에 의해 성전 예배와 율법 신앙이 회복이 됩니다. 그건 하나의 상징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전 예배와 율법 신앙이 온전히 성취되어 은혜로 운영이 되는 나라인데 중간에

예수 그리스도가 빠져 버리고 외형상의 하나님 나라의 성취가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49년은 일곱이레지요? 그렇다면 일곱이레 동안에 거룩한 성이 완전히 다 완성이 된다고 해야 맞는데

다니엘서 9장의 70이레의 예언에서는 일곱이레가 지나고 또 그 후로 62이레가 지나서 거룩한 성이 완성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표준 새 번역으로 그 부분을 보겠습니다.

 

(단9:25)(표준 새 번역)

25 그러므로 너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아 알아야 한다.예루살렘을 보수하고 재건하라는 말씀이 내린 때로부터

    기름을 부어서 세운 왕이 오기까지는 일곱이레가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예순두 이레 동안 예루살렘이 재건되어서, 거리와 성곽이 완성 될 것이나,

이 기간은 괴로운 기간일 것이다.

잘 생각해 보세요. 예루살렘 성 중건 명령이 떨어지고 정확하게 일곱이레 만에 예루살렘 성이 중건이 되었습니다.

그건 기름부음 받은 왕,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스라엘이라는 거룩한 성이 회복이 되는 구원이 이야기를 은유하고 있는 것이라 했지요? 따라서 거룩한 성이 중건이 되는 일에는 반드시 기름 부은 왕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역사 속에서는 예루살렘 성 중건이 일곱이레 동안에 일어났는데 계시 속에서는 일곱이레가 지나면

기름 부은 왕이 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62이레가 이어지는데 여기에서는 거꾸로, 62이레 동안에는 거룩한 성이 완성이 될 것이라는 계시가 나오는데 역사 속에서는 기름 부은 왕이 오셨다가 끊어지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렇지요? 이게 조금 힘들어요. 그러나 어렵지 않습니다. 잘 들어 보세요.

먼저 62이레 후에 정말 기름부음 받은 왕이 오셨다가 끊어지셨는지 계산을 해 드리겠습니다.

일곱이레동안에 역사 속에서 실제로 거룩한 성이 중건이 된 것이 BC408년이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62이레면 언제가 되는 것입니까? 62X7=434입니다. 434에서 408을 빼면 26이지요?

그렇다면 주님은 스물여섯 살에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것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BC에서 AD로 넘어가는 기점이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한 것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서른 살에 요한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세례가 실제화된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세례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까요.

그 이전 존재가 죽고 새로운 존재로의 합일과 연합을 이루는 것을 세례라 합니다.

아무튼 그렇게 기름부음 받은 자는 AD26년에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70이레의 계산이 맞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서른 살에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요?

예수님은 BC4년에 태어나셔서 AD30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게 역사의 기록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헤롯 대왕이 BC2년에 죽었으니까 적어도 그 전에 태어나셨어야 했잖아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 AD526년에 로마 황제 유스틴이 수도사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에게 예수님 탄생을 기점으로

서력기원을 바꾸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님이 태어나신 때보다 4년 뒤인 로마시 창건일을 기준으로

서력기원을 바꾸었습니다. 로마시민으로서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었겠지요.

그래서 서력기원은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4년 뒤를 기점으로 해서 출발을 합니다.

그러니까 BC4년에 태어나신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것이 AD26년이 맞는 것이고,

그 때가 예수님의 나이 서른이었을 때였던 것입니다. 소름끼치게 정확하지요?

 

그렇다면 이제 왜 기름부음 받은 자의 오심과 죽으심이 이렇게 혼동이 되게 기록이 되어 있는가에 대해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예수님의 요단강 세례는 죄인과 연합되시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셔서 거룩한 성을 회복시키시는 일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하나님에 의해 죽임을 당하시고 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걸 역사와 묵시의 오버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묵시적 존재……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역사 속의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물 위로 올라오셨을 때

성령이 임해버리지요? 그때 예수님은 성령으로 살아나신 것입니다.

목수의 아들 예수는 죽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서의 예수가 역사를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존재를 묵시적 존재라고 합니다.

역사를 살지만 역사와 관계없는 완료된 하나님 나라의 존재들을 묵시적 존재라고 합니다.

그러한 예수님에게 역사적인 세월은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이제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존재를 사도 바울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표현을 합니다.(고후5:17)

새로운 피조물은 10년 뒤에 죽어도 천국에 가고, 30년 뒤에 죽어도 천국에 가고, 100년 뒤에 죽어도 천국에 가고,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갑니다.

그의 결국은 이미 묵시 속에 완료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삼층 천에 올라가서 거기에 이미 완료 상태로 존재하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인생과 역사가 묵시 속으로 들어가 의미와 가치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후부터 역사 속에서 그가 당하는 고난에 의연했고

세상의 무시와 멸시와 천대에도 초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일을 시작하심으로 이스라엘을 진짜 거룩한 성으로

회복시켜 내시는 그 사건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모두 묵시 속에서 한 경점으로

묶이게 되는 것입니다. 내용이 같은 사건들이 역사 속에서 시간차를 두고 일어났지만

그때는 이미 묵시 속의 한 이레이기 때문에 그 사건들이 전부 하나로 묶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름부음 받은 자의 오심과 죽으심이 혼돈스럽게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이고

그것이 거룩한 성의 중건과 혼용되어 쓰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로마를 이 세상 마지막 나라로 표기를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2장에 보면 뜨인 돌이신 예수에 의해 완전히 박살이 나는 신상에 대한 해석이 나오지요? 느부갓네살의 꿈 말입니다. 그것은 바벨론 페르시아 알렉산더 제국과 로마 제국에 대한 계시임과 동시에 종말에 대한 계시입니다.

다니엘서 7장의 네 짐승에 대한 환상, 사자, 곰, 표범, 열 뿔 달린 짐승 역시 네 나라에 대한 계시입니다.

거기에서 공히 마지막 종말을 장식하는 나라가 어디입니까? 로마입니다. 예수께서 바로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는

로마로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 가셔서, 뜨인 돌로서 로마를 부수시는 것으로 역사가 종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새 언약 아래에서의 묵시의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종결된 역사를 묵시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므로 이 역사 속에서의 그 어떤 가치 있는 행위나 업적도 전부 가치와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의 모든 것들은 이제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드러내는 도구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쉬우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육일동안 창조를 하시고 칠일 째에 안식을 하셨지요?

그 안식의 날인 칠일 째까지가 천지창조의 완성지점입니다.

그건 하나의 모형이라고 했지요?

혼돈과 공허와 흑암뿐인 죽음의 땅이 생기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에 의해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인 거룩한 성이 되는

창세전 언약이 성취되는 그림자인 것입니다. 다니엘서의 처음 일곱이레가 바로 그 창조의 수, 칠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 창조가 그렇게 안식으로,

다른 말로 하나님의 제자리 회복으로 끝나게 될 것인데 그것이 칠이라는 상징적 기간 안에서 완료가 될 것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역사의 주기가 7이라는 숫자를 주기로 하여 순환되는 것입니다.

그건 시간과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흐른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새 창조의 영역 안에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기름부음 받은 자, 즉 메시아에 의해서 성취가 될 것임을 첫 일곱이레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62이레에서도 또 기름부음 받은 자가 등장하고 그의 죽음이 기술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62이레는 첫 일곱이레를 역사 속에서 설명해 주는 기간이 되는 것입니다.

일곱이레와 62이레는 똑같은 내용을 품고 있는 것인데 그것이 역사 속에서 풀려 재현이 되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BC408년에 실제로 역사 속에서 예루살렘 성이 중건이 되었습니다.

그 일은 다니엘이라는 인자의 모형이 바벨론에서 죽는 것으로 성취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성전 제사와 율법 신앙이 강화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기간 400년을 이스라엘의 암흑기라 부릅니다.

말라기를 끝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계시가 떨어지지 않는 시기입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율법 신앙으로, 성전 제사로 돌아가게 되면 그 끝은 죽음이며 암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 제사와 율법 신앙이 강화된 그 시기를 암흑으로 덮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 암흑의 이스라엘에 빛이신 예수가 오셔서 거룩한 성인 이스라엘을 십자가로 회복시켜 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어두움에 빛이 오셨는데 어두움이 빛을 알아보지 못했다’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62이레입니다.

그러니까 일곱이레는 62이레가 모형 화 되어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고

62 이레는 그 일곱이레를 역사 속에서 펼쳐 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체를 품어 안고 있는 것이 마지막 한 이레인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일곱이레 안에 모든 역사가 다 들어 있는 것이고, 62이레 속에도

역시 모든 역사가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체가 마지막 한 이레,

즉 묵시 속에서 완료가 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70이레인 것입니다.

다니엘서9장으로 돌아가 보시면 그 마지막 한 이레 동안에 어떤 일이 생길 것이라고 하지요?

 

(단9:26-27)

26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 되었느니라

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마지막 한 이레 바로 전에 기름부음 받은 이가 죽습니다.

그리고는 한 왕이 오는데 그 왕은 성읍을 훼파하여 전쟁을 하는 왕입니다. 심판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누구일까요? 개혁주의는 여기에서 헛갈리고 있는 것입니다.

27절을 보시면 다시 와서 전쟁을 일으키는 왕은 마지막 한 이레 동안 언약을 세우는데 그가 무엇을 금하느냐 하면 제사와 예물, 즉 성전 제사와 율법신앙을 금지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언약입니까?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완료가 되는, 몸과 법이 하나가 되어 대상에게 전가가 되는 언약입니다.

따라서 그 언약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가 누구와 전쟁을 합니까? 62이레 동안에 가짜 거룩한 성으로 발각이 된 이 세상의 율법주의와 유대주의와

싸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왕에 의해 가짜 성읍이 완전히 박살이 납니다.

그리고 그 왕은 마지막 날까지 성전 꼭대기에 흉물스러운 끔찍한 것을 세운다고 합니다.

그게 뭘까요? 가짜 거룩한 성의 가짜 종교행위를 종말 때까지 공격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아들은 가짜 교회들에게 흉물스러운 괴물로 여겨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인본주의적 종교 행위와 바리새적인 위선들을 공격할 것이니까요.

물론 그 이야기는 역사 속에서 로마의 황제와 로마의 군대로 역사화 되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은 묵시의 기간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그 역사 속에서 묵시를 읽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생애 동안에도 한 번 모형으로 나타났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다 쓸어버리시고,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셨지요? 그 이야기입니다. 율법주의, 유대주의는 흑암이라는 것입니다.

그건 다 파괴되고 훼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한 이레 동안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한 이레 동안 이 세상의 인본주의가 하나님에 의해 공격을 당하게 되고 이 세상의 성,

즉 이 세상 땅이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훼파될 것이라면, 그 한 이레 동안 이 세상이 어떤 상태로 던져지겠습니까?

고난으로 던져져야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한 이레를 7년 대환난이라고도 하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환난 속에서 묵시 속의 왕의 나라로 편입이 된 자들이 천년 왕국을 산다고도 하는 것입니다.

왜냐? 묵시의 세계는 시간 밖의 세계잖아요? 그래서 주님이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곳이라고 하신 거거든요?

거기에서의 천년이 영원, 즉 묵시의 영역입니다. 창세전이라는 말과 같은 말인 것입니다.

그 창세전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미 준비되었고 정해졌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아담 때부터 시작하여 전부 일곱이레와 62이레를 설명하는 모형의 나라라고 보시면 됩니다.

왜 그 묵시의 세계 속의 존재들이 천년 왕국을 역사 속에서 살게 된다고 말을 하는지 아시겠지요?

차치하고, 그러므로 그 마지막 한 이레를 사는, 묵시와 역사를 동시에 사는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무엇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들의 행위, 즉 율법주의와 유대주의와 인본주의를 공격당하면서 예수만 믿는 자로 부수어져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어찌 찬송을 안 할 수가 있겠습니까?

드보라와 바락의 찬송이 왜 전부 인간의 무력함과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가득 차 있는지 아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