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율법과 상한 심령,다윗과 밧세바의 사건,예수그리스도

2015. 11. 14. 12:32김성수목사님

177. 율법과 상한 심령,다윗과 밧세바의 사건,예수그리스도

사사기(6) 왼손잡이 에훗 왼손잡이 예수 ...본문기록

 

하나님께서 남겨두시고 하나님께서 강성케 하시는 대적의 정체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

해 드릴 테니까 잘 들어보세요.

 

(시51:16~17)

16.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 하시나이다

17.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 하시리이다

 

여기에 보시면 제사라는 율법과 상한 심령이 대조가 되어 제시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제사의 행위로 의에 이르려 하고 하나님은 상한 심령으로 의롭게 된다고 상반된 주장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이 이야기를 성경의 독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다윗의 범죄가 역사 속에서 사용되어진 것입니다.

그 유명한 밧세바 겁탈 사건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던 다윗에게 일어나게 된 배경과

그 속에서 터져 나온 다윗의 부르짖음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면

오늘 본문의 사사 에훗의 이야기의 이해가 훨씬 더 수월할 것입니다.

다윗은 왕입니다.그리고 율법을 잘 지키던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전사로 수많은 대적들을 물리친 장수였습니다.

외양으로 볼 때에는 어느 것 하나 나무랄 것이 없는 그런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어떤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는 고백이 절로 나오게 만드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개입하셔서 그의 실체를 폭로해 버리십니다.

하나님의 전쟁이 치러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다윗이 왕궁에서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렇게 잠을 자다가 밖으로 나왔더니 마침 아름다운 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었지요?

게다가 그 남편은 부재중이었습니다.죄를 지을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이 성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조건은 하나님께서 조성하신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 에피소드를 단지 다윗의 이야기로만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왕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힘을 사용하여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언제든지 자신의 소유로 만들 수 있는 그런 존재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모든 인간이 바로 그러한 왕의 자리를 추구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마다의 삶 속에서 작은 왕으로,자신의 유익만을 위하여 선택을 하고 전쟁을 하며 삽니다.

다윗은 바로 그러한 세상 왕들의 모형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이 보암 직도 하고 먹음 직도 한 먹잇감을 놓칠 리가 만무입니다.

다윗은 즉시 자신의 욕정을 채웠습니다.그리고 그 여인은 임신을 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의 소욕을 채운 후에 그것을 은닉하기 위해 암몬의 칼에 그 여인의 남편을 죽게 만듭니다.

죄의 교활함과 추악함을 보세요.

죄는 그렇게 자신의 위상과 깨끗함을 위해 서슴없이 증거인멸을 시도할 수 있을 만큼 무섭습니다.

물론 그 증거 안에는 사람도 들어 있습니다.

정작 그 죄의 주인은 자신임에도 다른 이를 죄의 주인으로 몰아넣고 자신만 살짝 빠져 나온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의 실체였습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통하여 아들을 낳습니다.

아들을 낳자마자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서 그의 죄를 낱낱이 밝혀 버립니다.

다윗은 그때까지 자기 죄의 심각성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다윗이 철면피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날을 보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32:3-4)

3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 하였도다

4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자기가 잘못한 것을 알아요.그래서 괴로워했습니다.

이미 자신의 죄로 뼈가 쇠하고 진액이 다 고갈 된 것과 같은 고통을 겪고 있던

다윗에게 무슨 죄를 또 지적해 주었다는 말이지요?

다윗은 분명 자신의 죄에 대해 고민을 했습니다.그러나 그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자신이 저지른 그 사건화 된 죄만 알았고 그것으로만 괴로워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악의 구조로 규정해 놓은 죄는 알고 있었지만 죄의 본질은 모름)

인간을 장악하고 있는 엄청난 죄의 세력에 대해서 다윗은 무지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다윗이 밧세바 사건을 저지르기 전에는 자신이 아주 훌륭한 의인인 줄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자를 자기가 해할 수 없다하여

옷자락만 베어 나오기도 했고(다윗의 잘난 척),하나님의 처소가 남루한 것이 마음이 아파 성전을 짓겠다고

나서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여 골리앗 앞에 서기도 했고 수많은 정복 전쟁에서 하나님의 장수로 혁혁한 공을 세웠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자신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했겠지요?

그 와중에 죄 하나 지은 것,괴롭긴 했지만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 자리로 그의 죄의 실체를 낱낱이 고발하는 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사람에 의해 자신의 생래적이며 본질적인 죄 성을 알게 되고

거기에서 상한 심령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단은 구원자의 모형으로 다윗에게 보내졌던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의에 대하여,심판에 대하여-신약)

부르짖음을 끌어 내십니다.

사무엘 하12장에 보면 마치 에덴동산의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책망하신 그 내용이 반복되어 나오는 것처럼

보여 집니다.

 

(삼하12:7-9)

7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8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9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 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들포도

하나님께서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만들어 주셨음에도 인간은 죄를 짓더라는 것입니다.

왜요?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죽어 버렸거든요.

죽은 자에게서는 시체 썩는 물밖에 나올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고만장한 인간들이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완벽한 환경에서 죄를 지은 아담은 바로 그러한 모든 인간 실존의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상한심령하나님의 일,하나님의 열심,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

인간은 그 어떤 완벽한 환경 속에 거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로 성숙되거나 완성될 수 없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하나님 은혜의 필연성이 그러한 에피소드들 안에서 반복되어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생래적,본질적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처럼’의 삶을 지향하며 사는 자들에게

인간 존재의 본질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처방을 내리셔야 하겠습니까?

사람 속에 들어 있는 죄 성을 발가벗겨 폭로시켜 버리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게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과 밧세바의 사건이었고

그 사건의 진의를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는 이로 나단이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사건화 된 작은 죄들을 짓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바로 죄의 나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에게서 사건화 된 그 작은 죄에 대한 용서의 부르짖음(시편32편)이 아닌

총체적인 인생의 구원을 부르짖도록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죄라는 원소로 만들어졌고 나라는 존재의 구성 재질이 죄’임을 고백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하시는 일입니다

 

(시51:3-5)

3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다윗이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지요?

자신의 죄가 사건화 된 개별성을 띤 것이라면 자신은 우리아와 밧세바에게 죄를 지은 것이어야 하는데

자신의 죄가 총체적이며 본질적인 하나님에 대한 죄의 열매로 맺혀진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그 개별적 죄들이 하나님께 지은 무서운 총체적 죄임을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참된 자신의 실존에 대한 자각에서 나오는 안타까움과 고통,속상함,해답 없음의 답답함 등을

상한 심령이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가 아니라,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바로 그러한 상한 심령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의 목적은 깨끗하고 훌륭하고 거룩한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이 아니라

(제사 행위),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인생의 답을 낼 수 없는 그런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상한심령)이어야 합니다.

 

(시40:6~8)

6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7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8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보세요.시편51편의 내용과 똑같은 내용이 또 나오지요?

하나님은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위를 기뻐 받으시는 분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상한 심령 대신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어떤 인물이 등장하지요?

그게 누구입니까?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상한 심령이란 철저한 자기부인과 자기절망 하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붙들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기술을 합니다.

 

(히10:1-10)

1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 하였으리요

3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 하셨도다

6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8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10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분명하지요?상한 심령은 무엇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물 맷돌 다섯 개로 골리앗과 싸우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거처인 성전을 멋지게 짓는 것도 아니고,통일 왕국을 이루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예수님 안 보내주셨으면 어떻게 할 뻔 했습니까?

감사 합니다’라는 상한 심령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걸 시편51편이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시51:7-8)

7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 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나의 죄는 나의 열심과 노력,나의 율법지킴이나 제사 행위에 의해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꺾으신 뼈,즉 우리야로 예표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사해지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을 상한 심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다윗이 시편32편에서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시32:1)

1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 인용을 하지요?

 

(롬4:4-8)

4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5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7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 다윗에게 이해되어지기까지 다윗의 죄가 낱낱이 세세하게 폭로가 되는 과정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 이해를 가지고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세요.

이스라엘에게서 사사가 떠납니다.

사사가 떠난 이스라엘은 곧 쓰레기처럼 세상에 나뒹굽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쓰레기임을 알아차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우상과 가나안의 문명과 가나안의 쾌락으로 자신들을 즐겁게 하는 데에 힘을 쏟습니다.

그게 여호와 목전의 악입니다.

그냥 그렇게 영원히 행복할 것 같고,아무도 그 삶에 제동을 걸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손수 대적들을 키워서 이스라엘에게 보내 버리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를 죽이려 하는 우리의 대적의 정체가 뭐냐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 때문에 죽지요?사망이 무엇 때문에 옵니까?죄 때문에 오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대적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죄입니다.

이해가 안 가시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적,죄를 보내신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그리고 그 죄를 도말하지 않으시고 남겨 두시게 하시고 그 죄를 강성케 하여 자기 백성에게 보내시는

하나님의 행사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 것인가?

다시 창세기부터 갑니다.

여러분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에 선악과나무가 있습니까?없습니까?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생명나무만 있습니다.

(계22:1-3)

1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2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3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보시다시피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생명나무만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하늘의 완료된 것이 시간 속에 펼쳐진 것이 역사라고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에는 있지도 않은 선악과가 에덴에 심겨져 있었다는 것은

선악과 자체가 어떤 교훈을 주기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계시록22장3절에서 성경이 그 선악과를 ‘저주’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생명나무 이야기를 하면서 독자들이 의문을 갖게 될 선악과나무의 소재를 ‘다시 저주가 없으며’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판단하게 되는 그 사태가 바로 하나님의 저주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들이 선악을 알게 된 뒤,그 선악구조에 의해 선악을 판단하고,자기들의 판단에 선이라고 규정한 것을

모으고 쌓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하나님 됨을 챙깁니다.

하나님은 그걸 악이라고 하십니다.

악이나 죄라는 개념은 사건화 되고 개별화 되어 나타나는 행위 정도가 아닙니다.

그건 죄와 악의 현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악이란,하나님 절대 의존 자들이 그 자리를 떠나서 자아의존의 상태로 살아가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 안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모든 인간이 바로 그 악의 상태에서 태어나 악을 살다가 악속에서 죽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이름이 성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도의 삶 속에 성도의 대적을 보내십니다.

그것도 두 배로 악한 놈이나 강성한 악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부르짖음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윗의 이야기와 연결시켜 보세요.

다윗은 죄인입니다.죽는 날까지 죄인입니다.그런데 그가 왕인 척 합니다.

왕의 행사를 꽤 잘 흉내를 냅니다.착한 척,용감한 척,잘난 척,종교적인 척,아주 훌륭하게 왕의 삶을 삽니다.

하나님은 그의 삶 속으로 그의 안에 감추어져 있던 죄를 깨워서 보내 버리십니다.

다윗 안에 감추어져 있던 무서운 죄가 다윗에게 감지가 됩니다.

그때 다윗에게서 자기절망과 자기부인의 외침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걸 상한 심령이라 했지요?

그게 바로 사사기의 부르짖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남기시고 보내신 대적은 우리 안의 죄 성으로 축약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걸 휘저어 버리시는 것입니다.위장하지 말라는 것이지요.연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교묘하게 감추어 두고 위장해 둔 죄를 하나님께서 들추어 내 버리시는 것을

대적을 보내시는 것으로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는 자기절망과 자기부인의 장으로 우리를 몰아가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참 사사이신 예수를 만나고 그분을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이스라엘의 대적으로 등장한 모압,암몬,아말렉,다 어디서 나온 자들입니까?

이스라엘에게서 나온 자들입니다.

모압과 암몬은 롯의 자손들이고 아말렉은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의 아들입니다.

인간 죄악의 산물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을 이스라엘 곁에 놔두셨습니다.

왜요?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이스라엘이 배태하고 생산해 놓은 것들이 얼마나 추악한 것인지를 보여주시고

경험케 하심으로 그들을 자기 절망과 자기 부인의 부르짖음,상한 심령 속으로 몰아넣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