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연합과 본받아...

2015. 11. 29. 16:32김성수목사님

159. 연합과 본받아...

- 로마서(62) 십자가와 부활의 케리그마 본문기록...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40년 광야를 거쳐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40년 광야 살이를 광야 교회라 명명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죠? 거기에서 이스라엘이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다 죽었습니다.

1세대, 즉 옛 사람이 다 죽고, 새 사람 60만명이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그 광야 교회를 그대로 가나안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도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가나안에서 그들이 의지하던 이 세상 왕국,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당해 죽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성전이 가나안에서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다 파괴됩니다.

광야에서의 장정 60만의 죽음과 동일한 형국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수요예배 때 공부했던 것처럼 역사 속 약속의 땅,

즉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짐승에게 맞아 죽는 것입니다.

(계17) 죽여서 살리는 것입니다. ‘저는 신랑 없으면 안 됩니다’

이게 바로 신부의 자기부정이며, 십자가이며, 죽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역사 속 아들의 나라를 신랑의 통섭 속에서 경험하며 신랑의 피 뒤로 함몰되어 들어가는 과정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나’라는 애굽 속에서 ‘나’가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신랑의 희생의 피를 통해서만(어린양의 유월절) 가능한 것임을 인정해가는 그 과정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 과정 전체와 그 과정의 결과를 ‘복’이라고 하고 그 ‘복’의 내용과 그 ‘복’ 전하는 일을

케리그마(Kerygma), 복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 사전참조 (그리스어로 ‘선언하다’ 혹은 ‘선포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 복음, 아름다운 소식에 합당한 이들은 그 십자가 복음에만, 신랑에게만 목을 매게 되는

자리로 서서히 옮겨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 복음(케리그마)에 합당한자, 복 받은 자들의 역사 속

현실을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마5:3)

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말’을 하십니다. 인간의 입에서는 더럽고 추악한 것만 나오는데(마15) 예수님의 입에서는

‘복’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산상수훈이라는 복의 말을 쏟아 부으시기 전에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마4:4)’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지금 너희를 살리는 그 말을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을 열어 ‘말’을 하셨다는 표현이 굳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눈을 열어 말을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럼에도 굳이 그런 상식적인 표현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마카리오이μακαριοι, 복이다’라고 말씀을 하신 후 당신의 신부들을 살리는 첫 번째 말씀을 하시는데

그 신부들을 살리는 신랑의 첫 번째 복의 말이 ‘마음이 가난한 자’입니다.

그 어절을 조금 풀어서 번역을 해 보면 이러 합니다. ‘복이다, 신랑에 대해 마음이 가난한 자는

천국에서 사는 자들이므로.’ 보세요. 마귀의 나라에서 생경한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자들은

무언가에 대해 마음이 가난해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가난하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단어는 ‘프토코이πτωχοι’인데

그 단어는 ‘절대적 가난’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정도의 빈곤이

아니라 그거 없으면 죽을 때 그 단어를 씁니다. 그런데 그것이 뭐겠어요?

 

(사61:1)

1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에 의해 전해지는 아름다운 소식, 즉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만 전해진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가난한 자는 무엇에 대해 가난한 자이겠습니까?

아름다운 소식에 대해 가난한 자이겠지요?

아름다운 소식, 그거 없으면 당장 목숨이 끊어지는 그런 사람들을 말합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자들입니다. 그 아름다운 소식은 하나님의 신, 성령에 의해 전해집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아름다운 소식, 복음의 말씀을 이렇게도 표현을 하십니다.

 

(요6:6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 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조금 전에 마태복음 4장 4절에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여기에서는 살리는 것이 영이라고 하지요?

그리고는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영, 프뉴마πνευμαG4151’라는 단어가 중성으로 쓰여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원래 프뉴마, 성령은 남성으로 쓰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여기에서 프뉴마를 중성으로 쓰심으로 해서 말씀과 성령을

하나로 표현을 하시는 것입니다.

프뉴마, 성령을 인격화 시켜 표현을 하지 않으시고 말과 동일한 것으로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부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살아났잖아요?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 성도는 예수님의 부활에 거저 붙어서 살아난 것이라고 하니까요.

따라서 말씀, 성령, 예수 그리스도는 모두 같은 내용 다른 표현일 뿐인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말씀(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이라고도 하고,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다 같은 것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복음, 즉 아름다운 소식, 말씀에 가난하다는 것은

저는 신랑 예수 없으면(프토코스πτωχόςG4434) 굶어 죽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이 어디서 산다고 합니까? ‘

복이다, 신랑에 대해 마음이 가난한 자는 천국에서 사는 자들이므로.’

그것이 역사 속 천국에 사는 자들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이 역사 속 천국, 약속의 땅(아직 실체가 오지 않았으므로 약속의 땅)가나안에서 사는 자들은,

자신의 실존인식을 ‘신랑이 없으면 난 먼지입니다.

신랑과 관계없는 난 죄인 중의 괴수일 뿐입니다.’로 갖게 되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건 아담의 죽음이며 아담의 자아상실인 것입니다. 자기부인....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옛 사람의 생명이 그렇게 스러져 갈수록 영의 나라에서 살아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케리그마의 내용이 죽음과 부활과 나타나심까지인 것입니다.

그건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와 부활은 시간적 순서를 가지고 우리에게 경험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세요.

 

(롬6:5)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여러분은 십자가에서 이미 죽으셨지요? 성경은 반복해서 우리 성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라고

과거 완료의 상태로 묘사를 합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는 아직 시퍼렇게 살아있어요.

쉽게 말해 묵시 속에서 완전히 자아를 상실한 존재가 역사 속에서는 조금씩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안에서 사셨습니다. 부활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죽은 자의 행실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납니다.

부활하고 있는 것입니다.구원의 현재이렇게 애기 할 수 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첫 번째 부활과 두 번째 부활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부활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묵시 속에 창조된 하나님 백성의 실존을 가리키는 것이고

두 번째 부활은 하나님 신부들의 역사 속 부활과정을 함의한 개념으로서의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서서히 죽으며 서서히 살아나는 역설의 현실 속에서 서서히 살아나게 되는

과정을 겪는다는 말입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닙니다. 실제입니다.

그렇게 서서히 죽으며 서서히 살아나던 성도가 종국에 육의 죽음 안에서 완전히 살아나게 되는 것이 두 번째 부활인 것입니다.

그게 양육입니다. 그리스도로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남.... 광야에서 자기부인의 삶.

그리로 자라나는 것임,그리스도를 닮은 삶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창조된 하나님 백성들이 역사 속에서 창조의 과정을 몸으로

살아내며 ‘아 이렇게 해서 우리는 산 존재가 되는 것이구나’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없음의 자리 죄인의 자리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역사와 인생이 구축한 옛 하늘과 옛 땅, 옛 흙, ‘나’가 죽는 과정(역 창조)과

동반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인생은 십자가와 부활이 동시에 일어나는 신비한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죽는 게 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신부는 없음의 존재로 신랑의 갈비뼈 속에 함몰되어 있을 때 비로소 ‘아들, 남자, 예수’가 되는

것임을 유감없이 경험하는 것이 신부들의 역사 속 천국살이인 것입니다.

그걸 모두 하나님 홀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5절에서 ‘본받아’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쉼휘토스σύμφυτοςG4854’는 열심히 따라해 보라는 의미의 단어가 아닙니다.

              사전참조-뜻;같이 자라다,밀접하게 연합하다,함께 계획하다.

                     쉰σύνG4862;(결합을 의미하는 전치사)함께,동참,교제,곁에,같이...

                         +휘오φύωG5453;내뿜다,불어대다,팽창하다,자라다,싹트다등..파생어에서 유래

생각해 보세요.

죽음은 어찌어찌 따라해 볼 수 있다고 하지만 부활은 어떻게 본받아 하실 겁니까?

피조물이 스스로의 힘으로 부활을 따라 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여기에서의 ‘본 받아라’의 의미는,

예수를 모델로 삼아 잘 따라해 보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그 ‘쉼휘토스’는 ‘연합’의 의미로 쓰인 단어입니다.

예수와 연합하여 죽고, 예수와 연합하여 살라는 것입니다.

그게 ‘본받아’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과 6장에는 딱 두 사람만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 안에서 죽고 한 사람 안에서,대표의 원리... 살아난 ‘없음’이라는 존재.

그게 교회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개별적 자아가 부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 두 사람 안에서 다 일어났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부활한 사람도 한 사람밖에 없어요.

첫 열매이신 예수 홀로 부활 하셨고 나머지는 그 예수에게 ‘붙어서’ 부활합니다.

교회의 개별적 부활이 모두 부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 15장에서도...예수님만 부활하시는 겁니다.

그 말은 하나님 앞에서의 존재는, 그 둘 안에서만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한 사람 안에 들어 있는 ‘없음’들은 그야말로 ‘없음’,

즉 흙의 자리에서 영원히 죽은 자 노릇을 하는 것이고(지옥)

두 번째 한 사람 안에 들어 있는 ‘없음’들은 어린양이라는 신랑 안으로 함몰되어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지체라는 말 자체가 각 지체의 독립성을 파기하는 개념입니다.

천국에는 예수라는 한 사람밖에 없어요. 그래서 교회를 예수의 지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교회 자체가 개별 몸통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 역사 속에서 개별적 자아를 몰수당하고 독립성을 파괴당하는 삶을 통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가 살게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다’라고 하신, 그 ‘길’이신 예수님이 어떤 길을 열어 놓으셨던가요?

열심과 성실과 노력과 분투에 의해 열리는 길을 열어놓고 가셨습니까?

선한 행위와 성숙한 자태에 의해 열리는 길을 열어놓고 가셨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길을 봉쇄해 버리고 가셨습니다.

그 유일한 ‘길’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 버렸단 말입니다.

십자가는 인간 측에서 천국에 이르는 모든 길을 닫아버린 사건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늘에 오르는 모든 길이 십자가에서 모두 철거가 되고 부정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유일한 길인, 한 사람 예수가 아니면 절대로 하늘로 가는 길이 없다는 것을 삶으로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쉽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본문에 나오는 한 사람 이야기를 완전하게 이해하시고 가셔야 합니다.

성경이 신랑과 신부를 한 몸이라 부르는 것은 신랑이신 하나님과 신부인 성도의 연합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쉽게 에둘러 한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천국의 존재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하나님만 의존하며 하나님만 찬송하는 존재여야 합니다.

그러한 연합의 상태를 성취해 내는 힘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둘을 하나로 만드는 힘, 그걸 사랑이라 합니다.

그런데 그건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라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네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내놔’라는 뜻이라 했지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40년 광야를 거쳐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40년 광야 살이를 광야 교회라 명명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죠? 거기에서 이스라엘이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다 죽었습니다.

1세대, 즉 옛 사람이 다 죽고, 새 사람 60만명이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그 광야 교회를 그대로 가나안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도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가나안에서 그들이 의지하던 이 세상 왕국,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당해 죽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성전이 가나안에서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다 파괴됩니다.

광야에서의 장정 60만의 죽음과 동일한 형국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수요예배 때 공부했던 것처럼 역사 속 약속의 땅,

즉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짐승에게 맞아 죽는 것입니다.

(계17) 죽여서 살리는 것입니다. ‘저는 신랑 없으면 안 됩니다’

이게 바로 신부의 자기부정이며, 십자가이며, 죽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역사 속 아들의 나라를 신랑의 통섭 속에서 경험하며 신랑의 피 뒤로 함몰되어 들어가는 과정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나’라는 애굽 속에서 ‘나’가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신랑의 희생의 피를 통해서만(어린양의 유월절) 가능한 것임을 인정해가는 그 과정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 과정 전체와 그 과정의 결과를 ‘복’이라고 하고 그 ‘복’의 내용과 그 ‘복’ 전하는 일을

케리그마(Kerygma), 복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 사전참조 (그리스어로 ‘선언하다’ 혹은 ‘선포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 복음, 아름다운 소식에 합당한 이들은 그 십자가 복음에만, 신랑에게만 목을 매게 되는

자리로 서서히 옮겨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 복음(케리그마)에 합당한자, 복 받은 자들의 역사 속

현실을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마5:3)

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말’을 하십니다. 인간의 입에서는 더럽고 추악한 것만 나오는데(마15) 예수님의 입에서는

‘복’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산상수훈이라는 복의 말을 쏟아 부으시기 전에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마4:4)’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지금 너희를 살리는 그 말을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을 열어 ‘말’을 하셨다는 표현이 굳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눈을 열어 말을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럼에도 굳이 그런 상식적인 표현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마카리오이μακαριοι, 복이다’라고 말씀을 하신 후 당신의 신부들을 살리는 첫 번째 말씀을 하시는데

그 신부들을 살리는 신랑의 첫 번째 복의 말이 ‘마음이 가난한 자’입니다.

그 어절을 조금 풀어서 번역을 해 보면 이러 합니다. ‘복이다, 신랑에 대해 마음이 가난한 자는

천국에서 사는 자들이므로.’ 보세요. 마귀의 나라에서 생경한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자들은

무언가에 대해 마음이 가난해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가난하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단어는 ‘프토코이πτωχοι’인데

그 단어는 ‘절대적 가난’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정도의 빈곤이

아니라 그거 없으면 죽을 때 그 단어를 씁니다. 그런데 그것이 뭐겠어요?

 

(사61:1)

1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에 의해 전해지는 아름다운 소식, 즉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만 전해진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가난한 자는 무엇에 대해 가난한 자이겠습니까?

아름다운 소식에 대해 가난한 자이겠지요?

아름다운 소식, 그거 없으면 당장 목숨이 끊어지는 그런 사람들을 말합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자들입니다. 그 아름다운 소식은 하나님의 신, 성령에 의해 전해집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아름다운 소식, 복음의 말씀을 이렇게도 표현을 하십니다.

 

(요6:6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 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조금 전에 마태복음 4장 4절에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여기에서는 살리는 것이 영이라고 하지요?

그리고는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영, 프뉴마πνευμαG4151’라는 단어가 중성으로 쓰여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원래 프뉴마, 성령은 남성으로 쓰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여기에서 프뉴마를 중성으로 쓰심으로 해서 말씀과 성령을

하나로 표현을 하시는 것입니다.

프뉴마, 성령을 인격화 시켜 표현을 하지 않으시고 말과 동일한 것으로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부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살아났잖아요?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 성도는 예수님의 부활에 거저 붙어서 살아난 것이라고 하니까요.

따라서 말씀, 성령, 예수 그리스도는 모두 같은 내용 다른 표현일 뿐인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말씀(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이라고도 하고,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다 같은 것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복음, 즉 아름다운 소식, 말씀에 가난하다는 것은

저는 신랑 예수 없으면(프토코스πτωχόςG4434) 굶어 죽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이 어디서 산다고 합니까? ‘

복이다, 신랑에 대해 마음이 가난한 자는 천국에서 사는 자들이므로.’

그것이 역사 속 천국에 사는 자들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이 역사 속 천국, 약속의 땅(아직 실체가 오지 않았으므로 약속의 땅)가나안에서 사는 자들은,

자신의 실존인식을 ‘신랑이 없으면 난 먼지입니다.

신랑과 관계없는 난 죄인 중의 괴수일 뿐입니다.’로 갖게 되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건 아담의 죽음이며 아담의 자아상실인 것입니다. 자기부인....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옛 사람의 생명이 그렇게 스러져 갈수록 영의 나라에서 살아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케리그마의 내용이 죽음과 부활과 나타나심까지인 것입니다.

그건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와 부활은 시간적 순서를 가지고 우리에게 경험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세요.

 

(롬6:5)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여러분은 십자가에서 이미 죽으셨지요? 성경은 반복해서 우리 성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라고

과거 완료의 상태로 묘사를 합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는 아직 시퍼렇게 살아있어요.

쉽게 말해 묵시 속에서 완전히 자아를 상실한 존재가 역사 속에서는 조금씩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안에서 사셨습니다. 부활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죽은 자의 행실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납니다.

부활하고 있는 것입니다.구원의 현재이렇게 애기 할 수 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첫 번째 부활과 두 번째 부활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부활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묵시 속에 창조된 하나님 백성의 실존을 가리키는 것이고

두 번째 부활은 하나님 신부들의 역사 속 부활과정을 함의한 개념으로서의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서서히 죽으며 서서히 살아나는 역설의 현실 속에서 서서히 살아나게 되는

과정을 겪는다는 말입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닙니다. 실제입니다.

그렇게 서서히 죽으며 서서히 살아나던 성도가 종국에 육의 죽음 안에서 완전히 살아나게 되는 것이 두 번째 부활인 것입니다.

그게 양육입니다. 그리스도로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남.... 광야에서 자기부인의 삶.

그리로 자라나는 것임,그리스도를 닮은 삶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창조된 하나님 백성들이 역사 속에서 창조의 과정을 몸으로

살아내며 ‘아 이렇게 해서 우리는 산 존재가 되는 것이구나’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없음의 자리 죄인의 자리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역사와 인생이 구축한 옛 하늘과 옛 땅, 옛 흙, ‘나’가 죽는 과정(역 창조)과

동반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인생은 십자가와 부활이 동시에 일어나는 신비한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죽는 게 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신부는 없음의 존재로 신랑의 갈비뼈 속에 함몰되어 있을 때 비로소 ‘아들, 남자, 예수’가 되는

것임을 유감없이 경험하는 것이 신부들의 역사 속 천국살이인 것입니다.

그걸 모두 하나님 홀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5절에서 ‘본받아’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쉼휘토스σύμφυτοςG4854’는 열심히 따라해 보라는 의미의 단어가 아닙니다.

              사전참조-뜻;같이 자라다,밀접하게 연합하다,함께 계획하다.

                     쉰σύνG4862;(결합을 의미하는 전치사)함께,동참,교제,곁에,같이...

                         +휘오φύωG5453;내뿜다,불어대다,팽창하다,자라다,싹트다등..파생어에서 유래

생각해 보세요.

죽음은 어찌어찌 따라해 볼 수 있다고 하지만 부활은 어떻게 본받아 하실 겁니까?

피조물이 스스로의 힘으로 부활을 따라 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여기에서의 ‘본 받아라’의 의미는,

예수를 모델로 삼아 잘 따라해 보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그 ‘쉼휘토스’는 ‘연합’의 의미로 쓰인 단어입니다.

예수와 연합하여 죽고, 예수와 연합하여 살라는 것입니다.

그게 ‘본받아’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과 6장에는 딱 두 사람만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 안에서 죽고 한 사람 안에서,대표의 원리... 살아난 ‘없음’이라는 존재.

그게 교회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개별적 자아가 부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 두 사람 안에서 다 일어났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부활한 사람도 한 사람밖에 없어요.

첫 열매이신 예수 홀로 부활 하셨고 나머지는 그 예수에게 ‘붙어서’ 부활합니다.

교회의 개별적 부활이 모두 부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 15장에서도...예수님만 부활하시는 겁니다.

그 말은 하나님 앞에서의 존재는, 그 둘 안에서만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한 사람 안에 들어 있는 ‘없음’들은 그야말로 ‘없음’,

즉 흙의 자리에서 영원히 죽은 자 노릇을 하는 것이고(지옥)

두 번째 한 사람 안에 들어 있는 ‘없음’들은 어린양이라는 신랑 안으로 함몰되어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지체라는 말 자체가 각 지체의 독립성을 파기하는 개념입니다.

천국에는 예수라는 한 사람밖에 없어요. 그래서 교회를 예수의 지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교회 자체가 개별 몸통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 역사 속에서 개별적 자아를 몰수당하고 독립성을 파괴당하는 삶을 통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가 살게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다’라고 하신, 그 ‘길’이신 예수님이 어떤 길을 열어 놓으셨던가요?

열심과 성실과 노력과 분투에 의해 열리는 길을 열어놓고 가셨습니까?

선한 행위와 성숙한 자태에 의해 열리는 길을 열어놓고 가셨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길을 봉쇄해 버리고 가셨습니다.

그 유일한 ‘길’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 버렸단 말입니다.

십자가는 인간 측에서 천국에 이르는 모든 길을 닫아버린 사건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늘에 오르는 모든 길이 십자가에서 모두 철거가 되고 부정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유일한 길인, 한 사람 예수가 아니면 절대로 하늘로 가는 길이 없다는 것을 삶으로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쉽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본문에 나오는 한 사람 이야기를 완전하게 이해하시고 가셔야 합니다.

성경이 신랑과 신부를 한 몸이라 부르는 것은 신랑이신 하나님과 신부인 성도의 연합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쉽게 에둘러 한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천국의 존재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하나님만 의존하며 하나님만 찬송하는 존재여야 합니다.

그러한 연합의 상태를 성취해 내는 힘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둘을 하나로 만드는 힘, 그걸 사랑이라 합니다.

그런데 그건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라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네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내놔’라는 뜻이라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