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온유’‘겸손’=성도가 기업으로 받는 땅.

2016. 1. 10. 11:52김성수목사님

178 ‘온유’‘겸손’=성도가 기업으로 받는 땅.

       산상수훈(4)온유한 자가 기업으로 받는 땅 본문기록

 

          (마5: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오늘 본문을 직역하면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은 자는 온유하다, 그는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입니다.

오늘 본문은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습니다. 온유하면 복 받는다. 그리고 그 복의 구체적인 내용은 땅이다.

쉽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정말 그런 뜻이겠습니까? 정말 온유하면 땅을 기업으로 받나요?

땅을 얻으려면 온유해서는 안 됩니다. 억척스러워야지요.

복부인들이 온유해서 좋은 땅 차지할 수 있나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국어사전에서 ‘온유’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성격, 태도 따위가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이 있는 자는 온유하다,

그는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 온유가 그런 종류의 것일까요?

제가 누누이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이 산상수훈의 내용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성도에게서만 나타나게 되는 현상이요 됨됨이요 지향성인 것이라 했지요?

그러면 이 산상수훈의 내용은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가 정말 국어사전의 개념처럼 사람의 온화한 성품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런 성품을 가진 사람은 타 종교인이나 불신자들에게서 더 많이 볼 수 있잖아요?

그리고 그러한 성품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기질에서부터 갈리는 것 아닌가요?

꼭 예수를 믿어야만 나오는 그런 성품은 아니잖아요?

저도 살아오면서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 여럿 만나 보았는데 그들은 다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온유’의 대명사처럼 묘사가 되는 인물이 하나 나오지요?

모세입니다.

 

(민12:3)3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성경은 모세의 온유함이 땅 위에 사는 사람 중에서 최고였다고 극찬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랬나요? 그런 사람이 욱하는 성질을 못 이기고 애굽 군사를 때려죽입니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온유하기만 했나요? 수시로 경책하고 야단치고 화를 내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 반석을 두들겨 패기도 했고, 첫 번째 십계명 돌 판을 받아서 시내산 아래로 내려왔을 때에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잔치를 벌이자

그 첫 번째 십계명 돌 판을 그들에게 집어 던져서 박살을 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그 모세가 이 땅에 사는 모든 인간들 중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다고 기술을 하고 있습니다.

백 보 양보해서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표면적 모세의 모습만 보고 진짜 온유한 모세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일 수 있다고 하자고요.

그렇다면 그렇게 온유한 모세는 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못 받았을까요? 온유한 자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준다면서요?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그러한 성품이나 기질 같은 종류의 온유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온유라는 단어로 번역이 된 헬라어 ‘프라우스(πραὐςG4239)’단어는

‘가난한, 억압받는, 겸손한, 짓눌린, 낮은’등의 뜻을 담고 있는 포괄적 의미의 단어입니다.

히브리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특히 시편과 이사야서에서 온유와 가난과 고통, 억압 등이 ‘아나브(ענוH6035)’ 한 단어로 혼용되어 쓰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온유라는 것은, 부드럽고 다정한 성품을 가리키는 것이기 보다는,

닥친 상황에 대처하는 자세나 반응 같은 것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조금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가리켜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지요? 거기에 쓰인 단어가 똑같은 단어입니다.

 

(마11:28-30)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여기에는 온유와 겸손이 다른 단어로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온유는 오늘 본문의 그 온유와 같은 단어

 ‘프라우스(πραὐςG4239)’이고, 겸손은 ‘짓눌린, 천한, 초라한, 굴욕감을 느끼는, 애통한’등의 뜻으로 쓰이는

 ‘타페이노스(ταπεινόςG5011)입니다.

그러니까 이 온유라는 단어는 심령이 가난한 자에서의 가난과 애통한 자에서의 애통을 모두 품고 있는

그런 단어인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과 세상의 죄로 말미암아 애통하게 되어 있고 그들은 곧

온유의 상태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산상수훈은 모두가 연결이 된 것이지 각각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1장으로 가면 겸손이라는 단어가 ‘온유, 프라우스(πραὐςG4239)’로 쓰입니다.

(마21:5)

5.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여기에서 ‘겸손’의 자리에 쓰인 단어가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온유’라는 단어 ‘프라우스’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온유라는 것은 고난과 핍박과 억눌림과 낮은 자리 등과 관련이 있는 단어인

것입니다. 겸손도 마찬가지고요.

원래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겸손은, 많이 가지고 많이 배운 자가 그렇지 않은 것처럼 행세를 할 때에

그를 칭송하는 그런 의미 정도가 아닙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겸손의 개념은 하나님 앞에 선 자의 마땅한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반대가 교만 히브리스.피조물이 자기의 자리를 떠나버리는 것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시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자들을 부르시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의 짐을 쉽고 가볍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짐이 뭡니까? 십자가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가볍고 쉬운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단 말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과 쉽고 가벼운 내짐 사이에 샌드위치 속처럼 들어가 있는 것이 뭐지요? 온유입니다.

겸손입니다.

따라서 온유라는 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쉽고 가벼운 것으로 인식하게 해 주는 어떤 강력한 힘인 것입니다.

그 온유와 겸손과 멍에가 어디에서 인용이 된 것입니까? 스가랴서 9장에서 인용이 된 것입니다.

 

(슥9:9~11)

9.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 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 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10.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11.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예수님께서 바로 이 대목을 인용하셔서 당신은 온유한 자라고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겸손하여서’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아니(עניH6041)’가 ‘아나브(ענוH6035)’와 같은 어근을

가진 단어입니다.

(아나ענהH6031-기본어근 ;위협하고 있다.누르다,자기를 낮추다.괴롭히다.고통을 주다.복종시키다 등)

그 단어는 말씀드린 대로 ‘온유, 겸손’의 뜻도 가지고 있지만 ‘비천, 억압, 낮아짐, 고통, 굴욕’등의 뜻도

함께 가진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겸손한 왕이 멍에 메는 나귀(주인에게 붙들린 나귀,하나님께 붙들려서 사용되는 나귀)를 타고 시온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뭘 하러 들어가는 것이지요? 11절에 기술된 것처럼

‘피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새끼 나귀를 타고 들어가는 것(새끼나귀가 되어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온유’라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성취의 과정에서 자신의 뜻이 비워진 채로 하나님의 뜻과 능력에 밀려서, 그 길이 비록 고통과 환난과 억압과 낮아짐과 굴욕의 길이라 할지라도,

그 언약 성취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온유입니다.

 

여러분들이 기질로 가지고 있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성품으로도 쌓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역사 속에 내려오셔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거나

자신을 증명하거나 자랑할 수 없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확인한 자가 그 뜻이 성취 되어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쓰이는 자신의 신분을

자각하고 그 어떤 환난과 고통과 굴욕에도 담담해 지는 상태, 확고한 믿음의 자리에서 공고해 지는 상태를 온유

하는 것입니다. 그건 성품의 문제도 아니고 기질의 문제도 아닌 것입니다.

언약 안에 들어 있는 자들의 처음 자리 인정이요, 어쩔 수 없음의 몸짓이며, 속수무책의 고백이 온유인 것입니다.

그건 인간들이 노력해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왕 노릇이 성도라는 하늘 백성들 안에서 만들어 내는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한 온유가 바로 성도가 기업으로 받는 땅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