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13. 11:00ㆍ김성수목사님
서울서머나교회
172-1. “우리”라는 개념...
- 로마서(85) 토닥토닥(녹취본) 본문기록...
(롬8:7-11)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과 당신 백성들을 우리로 묶어버리세요.
구약성경에 보면 자주 나와요. 신약성경에서는 사도들이 또 우리라는 말을 잘 쓰지요.
뭐, 고전중에 마틴루보의 “나와 너“라는 책이 있는데 읽으라고 말씀드리는 건 아니에요.
쓰레기 같은 책이에요. 예전에는 저가 그 나완어를 그것에 근거하여 정리를 해 봤었는데
그거는 다분히 인위적인 정의에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문자에서 보면 히브리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라는 단어는 나와 너의 우리가 아니에요. 나들이에요.
다 나, 나, 나, 나가 모이면 그걸 우리라고 그래요.
나의 복수를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함몰되어 들어와서
하나님 나 아니네요.
하나님이 나를 살려야 나는 비로소 그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산존재 되는 거였네요 라고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안으로 함몰되어 들어와 그것과 연합되면 그 고백이 나의 죽음이잖아요 그죠. 보세요.
선악과를 따먹고 인간은 항상 선악의 주체가 되어서 자기가 하나님처럼 살아요.
그래서 피곤한 거에요.
내가 선악의 주체가 되어서 이건 선한 거야 악한 거야를 늘 결정하고 선택해야 되기 때문에
그게 지옥이라니까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상대편에서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탄핵을 해요.
아! 하나님 공평하지 못해 그렇게 일하면 안돼요.
내가 어떻게까지 정성을 들였는데 나한테 이렇게 대해 이렇게 된다니까요 인간이.
신앙을 가진다고 하면서도 그러면 하나님 측면에서 나는 너에요.
나와 너로 갈라지는 거라니까요. 그게 아브라함의 이야기 창세기 15장에서의 케리투트에요.
제물을 사이에 두고 인간과 하나님이 이혼증서를 가운데 두고있는 것이
케리투트(פּריתוּתH3748) 이혼 분리divorce, 카라트פּרת(H3772)로 갈라진다 말입니다.
그거는 분리에요.
하나님 저는 이렇게 하나님과의 대척점에서 나의 수고와 노력이 이 제물로 말미암아 이렇게 갈라지면 안되는 거네요 라고
내가 죽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과 내가 한쪽에서 바라보게 돼요.
사랑은 뭐! 서로 마주 보는게 아니라 한쪽으로 바라보는 거라매요 야튼 뭐 그런 거에요.
하나님과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되는 거에요. 그래서 제사를 지낼 때도 그러는 거에요.
병풍이 항상 열폭이라고 그랬지요. 그 병풍 뒤는 항상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가려 놓는,
그 병풍이 가리고 그 뒤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것을 상징하는 거에요.
그래서 사람이 항상 죽으면 그 뒤로 들어가는 거에요. 죽지 않고 들어가면 거기서 싸우러 들어가거나 얻어
터지러 들어가거나지, 죽어야 그 비밀 속으로 들어가는 거라니까요.
열폭은 뭐냐하면 휘장이 열폭이었어요. 그래서 병풍을 열폭으로 만든거거든요.
여러분이 죽지 않으면 그 하나님의 묵시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 편으로 넘어갈 수가 없어요.
그렇게 넘어가면 하나님과 내가 나가 돼요. 그 때 그걸 성경이 우리라고 한다니까요.
사도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렇게 해서 우리라는 개념을 써요 그들은요.
하나님이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면서 하나님 내가 누가 보냈냐고 물어보면, 너 누가 보냈어 라고
물어보면, 누가 보냈다고 이야기해야 돼요? 그랬을 때 하나님이 준 단어가 뭐냐고 하면 ‘나’ 에요.
영어로 Im who I am이라고 써 놓았지만 그 단어가 그냥 나라니까요.
그 때 당시의 문헌들을 다 뒤져봐도 나라는 단어가 없어요. 그건 사람들이 쓰는 단어가 아니었어요.
그 제왕들의 비석같은 것을 봐도 사람이라고 써요 나를.
근데 그 때 처음으로 하나님이 나 라는 단어를 준거에요.
나, 그럼 모세가 가서 뭐라고 해요. 너 누가 보냈어라고 했을 때 “나” 그러면 사람들이 네가 너를 보냈냐?
그럴 거 아니에요.
하나님이 거기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내가 너에게 내 말을 주면 너는 그 즉시 네 육을 삭제 당하게 되고
네가 내 말이 되는거야; 그게 나야 네가 내 역할을 하는 거야.
이게 나라고요. 하나님의 이름이 나라는 말이 아니라.
그 나,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는 전부 그 나에요 예수 나가 아니라.
따라서 우리는 예수와 십자가를 섬기는 수준에서 진일보해서 그 예수의 생애와 그 십자가의 죽음을 내것으로 하여
살아야 되는 거에요.
아니 절대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어요.
그래야 자기 십자가를 진 우리가 되는 거에요.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너로 존재하면서 그분을 두려움으로 섬기는 자리,
그 수준에서 머물러 있으면 안돼요.
그게 죽음이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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