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3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2013. 8. 5. 12:36김성수목사님

 

서울서머나교회

85-3.‘우리 주’‘예수 그리스도’...

    - 사도신경강해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3)’본문중에서...

 

우리가 기독교에 대한 올바른 정의를 내리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죽는 날까지 하나님의 무지와 지혜 없음과 무관심과 이기심을 욕하다가

결국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자기 이외의 모든 외부 존재들을 자신의 종삼아 살고 싶어 하던 죄인들이, 하나님의 종의 자리로 내려와,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목숨 걸고 해내는 자로 완성이 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종처럼 부리며,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공급해 주고,

해결해 달라고 협박을 하거나 졸라대는 종교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우리 주’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이 ‘주’라는 칭호는 Cf Stauffer가 ‘가장 풍성한 기독론 적 칭호’라고 부를 만큼 아주 중요한 칭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의 주’라는 사실을 고백할 때, 우리는 그 안에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지

지금부터 차근차근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예수님 이외에도 ‘주님’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여러 명 등장을 합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빌라도를 부를 때 ‘주여’라고 부릅니다.

또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동산지기로 잘 못 알고 부를 때도 ‘주’라는 호칭을 씁니다.

베드로 전서에 보면 아내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을 부를 때 ‘주’라고 부른 것을 알 수 있지요?

뿐만 아니라 로마의 황제들을 부를 때나,

제자들이 선생님을 부를 때,

그리고 종들이 주인을 부를 때에도 ‘주’라는 호칭을 썼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에게 붙여진 ‘주’라는 호칭도 모두 동일한 의미로서의 ‘주’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자리에서 그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요13:13)’라고 하셨을 때에 쓰인

‘주’라는 호칭은 ‘랍비’라는 뜻과 거의 흡사하게 쓰인 것입니다.

랍비(Rabbi)라는 말은 ‘크다’라는 의미의 ‘Rab'에서 나온 단어로서 ‘나의 크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 단어가 주전 2세기 때부터 ‘나의 선생님’이라는 의미로 쓰였고, 나중에는 ‘나의’라는 의미가 퇴색이 되며

그냥 ‘선생님’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선생님’이라는 의미를 담은 단어로 ‘주’라는 단어가 호환되어 쓰이기도 했는데

그 단어가 지금 예수님에게 쓰여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귀신들려 말 못하고 간질병의 질환을 나타내던 아이를 예수님께서 고쳐 주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그 아버지가 예수님을 부를 때 ‘주여’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 9장에서는 그 아버지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에게 쓰인 ‘주’라는 호칭도 역시 ‘선생님’의 수준에서 쓰인 호칭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고 말을 할 때

그 ‘주’는 완전히 다른 의미의 단어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할 때 그 ‘주’는 부활로 말미암아 최고의 자리로 높아진,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을 부를 때 사용되는 단어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십계명 중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에 충실 하느라 성경을 읽을 때에나,

필사를 할 때, 혹은 이야기 중에도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얼른 목욕을 하고,

붓을 빨아 ‘여호와, YHWH’라는 이름에 자음을 붙여 ‘아도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쳐서 쓰거나 읽었습니다.

* 산상수훈에서 ...* 야훼(여호바יהוֹה=여호와H3068)

- 바브를“와우”라고도 읽음

*(야יהּ) = 여호바,여호와 로 읽음.

= 말(소리)

= 내말을 줄꺼야-어떻게?=네 (야),말로

= “내 말을 네 말로 쓸게”

- 하나님이 그 말씀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우리가 그 하나님을 담을 수 있는 그 그릇만큼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말로 주셨을 때 그 것을 여호와(예호바)라고 합니다.

- 이것은( 여호와(예호바))우리가 알수 없는 것입니다.

 

그 ‘아도나이אךניH136’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옮길 때 ‘큐리오스κύριοςG2962’ ‘주’라고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70인 경에서는 ‘주’라는 단어가 ‘YHWH, 여호와’라는 이름의 대치어로 무려 6,000번이나 등장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을

함의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선생이나, 집 주인이나, 왕이나, 남편 정도를 가리키는 그런 ‘주’가 아닌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도마가 부활하여 나타나신 예수님을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을 했지요?

바로 그 단어 ‘큐리오스’가 부활하심으로 만물의 머리가 되신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호칭인 것입니다.

제자들도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주와 그리스도’(행2:36)라고 불렀습니다.

그 때에도 ‘주’라는 호칭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서의 주님을 가리키는 호칭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로마서 14장 9절에도 잘 나타나 있는 것처럼,

부활하신 그는 참으로 ‘죽은 자와 산 자의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이야기입니다.

 

(엡1:20~22)

20.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이렇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을 한다는 것은

그 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심지어 하나님이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만물을 다스리는 왕으로

등극을 하셨다는 것을 모두 아울러 고백을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게할더스 보스는 ‘주’라는 호칭을 이렇게 정의를 했습니다.

‘주님이라는 명칭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셔서 들어가신 새로운 수준의 메시아적 주권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썼던 ‘주’라는 호칭과 비교하여,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인 ‘주’라는 호칭은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과 존재론적으로 동일시되는

성자로서의 예수님을 인정하고, 한 발 더 나아가 피조 계와 교회의 주권자이신 그 분 앞에서의 복종의 고백까지 아우르는

청난 고백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되시며(행7:59, 고전16:22),

믿음의 대상이 되십니다.(행9:42, 11:24) 뿐만 아니라 그 분은 만왕의 왕이시며, 만 주의 주이시며(계19:16)

특히 교회의 주님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분을 ‘주님’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그 분의 종의 신분임을 확인하는 것이며,

그 분이 바로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주라고 부르는 이들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가타부타 원망이나 불평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따로 있거든요. 어떠세요? 그래도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시겠습니까?

오늘부터 그 호칭은 잊어버리기로 할까요?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수시로 ‘주님’이라 부르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이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과 존재론적으로 하나이신 하나님이심을 믿으십니까?

그리고 그 분이 모든 피조 계와 교회의 주권적 존재이심을 인정하십니까?

이 둘을 다 인정하신다면, 우리 주님께서 피조 계에, 아니 교회에 속해 있는 여러분의 삶에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까? 아니면 부당합니까?

여러분이 ‘주’라고 부르시는 그 분이 여러분에게 에이즈를 걸리게 했다고 해서 그것이 부당하다고 항의 할 수 있나요?

여러분이 ‘주’라고 부르시는 그 분이 여러분의 자녀를 어린 나이에 일찍 데려 가셨다고 해서 그것이 옳지 않은 이기적

처사라고 삿대질을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인생의 주인께서 여러분에게 맡긴 인생이 가난하고 병들고 연약한 인생이라고 해서 그 주인에게

‘왜 나에게 이런 걸 맡겨요?’ 하고 불평할 수 있어요? 아닙니다.

우리가 잘 쓰는 엿장수 마음이라는 관용구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엿판 위에서 우리가 공정성이나 공평성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께서 뭉툭한 엿 가위로 이런 저런 모양으로 잘라내어 우리에게 던져주시는 우리 인생을 받아들고

우리가 그것을 주신 주인께 가타부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뿐 아니라, 모든 피조 계의 주인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분을 ‘주님’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말 당신의 아들을 ‘큐리오스, 주님’이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자인지를

수시로 시험을 하십니다.

서두에 말씀을 드린 두 사람, 청년 시절에 아무런 잘못 없이 수혈로 말미암아 에이즈에 걸려 죽어가던 그 젊은이,

아들과 남편을 일찍 여의고, 그나마 남아 있던 어린 막내 아이를 영양실조로 보내야 했던 그 여인,

하나님께서 그 두 사람의 상황 속에서 확인하시고 싶으셨던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내 아들아, 내 딸아, 너희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종으로 기꺼이 남을 수 있겠니?’하고

그들의 종 됨을 확인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은 바로 그것입니다. ‘

내 종들이 정말 나를 주인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그것이 확인이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선악과를 따먹지 않을 수 있는 자가 되어 하나님 나라로

입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김동길 교수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일제시대 때 함경도의 한 도시에 미친 여자가 하나 있었답니다.

옷이 다 헤져 속살이 다 보이고, 너무나 더럽고 지저분하고 냄새가 나서, 사람들이 먼발치에서도

그녀의 불쾌한 냄새를 맡고는 열심히 그녀를 피해 다녔다고 합니다. 그 여자는 그 불쾌한 냄새를 풍기며, 사람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당하면서도 부지런히 매일 아침 그 도시를 돌며 구걸을 했습니다. 나중에 소련군이 그곳에 진군해 들어왔을 때,

그 도시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지저분하고 더럽고 추했던 그 미친 여자가 근사한 소련군 장교복을 입고 그들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녀는 소련에 의해 파견된 여 간첩이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국가의 부름을 받고 여자로서 가장 치욕스러운 모습을 하고 그 도시에 숨어있는 친일파들과 내통자들을 색출해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자는 나이가 팔십이 넘어도 남들에게 예뻐 보이고 싶은 것이 본능입니다. 그런데 새파란 청춘의 여인이 젖가슴을 다 내어놓고 수시로 부랑자들에게 겁탈을 당하면서, 세수는 물론 목욕도 못하고 수년간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악몽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국가의 부름을 받고 주인의 명령에 순종을 한 것입니다. 일개 국가가 나를 불러도 그렇게 미친 짓까지 해가며,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 내야 하는 것이 주인 앞에서의 종의 의무인 것입니다.

멀쩡하게 맨 정신인 여자가 수개월간 세수는 물론이요, 목욕도 못하고, 더러운 냄새까지 풍기며, 수시로 부랑자들에게 겁탈을 당하면서도 조국이 자신에게 맡긴 임무를 다 해내느라 인내하고 참으며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파견된 하나님 나라의 종들입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여러 모양, 여러 색깔의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그 중에는 가난한 역할도 있고, 못생긴 역할도 있고, 부자의 역할도 있고, 잘생기고 예쁜 역할도 있습니다.

그 중에는 단명 하는 역할도 있으며, 장수의 역할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냥 주인이 우리에게 맡긴 그 역할에 충실하게

순종하며 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소유로 사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고전6:19~20)

19. 여러분의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여러분 안에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스스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20.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사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이렇게 이제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값을 주고 사신바

되었기 때문에 주님이 시키는 삶을 종으로서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4번 질문을 볼까요?

34. 왜 당신은 그리스도를 주라 부릅니까?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금이나 은으로가 아니라, 그의 보배로운 피로써 우리를 죄와 마귀의

    모든 세력에서 구속하시고 사주셔서 그분 자신의 것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스스로 주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롬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우리는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는 자들이지, 주님을 불러 우리를 좀 섬겨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으로, 사명자로 보내진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 의도하시는 그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분별하며,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열심히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 공부가 중요한 것이고, 기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에 전혀 힘쓰지 않고는 절대 자신의 이해 할 수 없는 처지를 하나님의 뜻으로

수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