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예배하는자와 자신을 예배하는자

2013. 8. 5. 12:29김성수목사님

 

서울서머나교회

84.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와 자신을 예배하는자

 

- 창세기 21장 말씀 본문기록...

모든 인간은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그리고 자신을 예배하는 자’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선물로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예배하는 삶을 살지 않게 됩니다.

물론 당장은 자신만을 위해서 살던 오염된 육체 속에서 살기 때문에 여전히 옛 사람과의

전쟁 속에서 살게 되지만 성도들은 점점 자신의 육신을 죽여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삶으로

성숙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하나님의 양육’이라고 부릅니다.

 

(계12:6,14)

6.그 여자가 광야로(교회,인생길,역사)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14.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우리 성도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양육 속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자신을 예배하는 자’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순종하며 의존하며 의뢰하는 삶을 사는‘하나님을 예배하는자’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 것들을 하나하나 놓아가면서 오늘 주님이 오실 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전부를 주님께 드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그러한 삶을 가리켜 종말론적 신앙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기뻐 열납하시는 올바로 예배하는 자의 삶인 것입니다.여러분은 자신 있으세요?

만일 오늘 주님이 오신다 해도 난 기쁘게 주님을 맞을 수 잇다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그게 예배자의 삶이라는 데 그러한 삶이 나에게서 나오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두려워해야지요.

혹시 여러분은 여전히 자신을 예배하는 삶을 사시는 가인은 아닙니까?

이렇게 예배자의 삶은 종말론적인 신앙을 말하는 것이기에 두 부류의 예배하는 자들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오늘 본문의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세월이 지난 뒤에’라는 어구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4:3)

세월이(욤יוֹםH3117) 지난(케쯔קץH7093) 후에(하야היהH1961)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여기서 ‘세월이 지난 후에’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와예히 믹케츠 야밈’이라는 어구는

                                                                            vay-Hi(ויהי) mik-Ketz(מקץ) ya-Mim(ימים)

원래대로 직역을 하면 그리고 그 날 들의 끝으로부터,종말에’라는 뜻이 됩니다.

영어로는 ‘in the end of the day'입니다

왜 최초의 예배에 관한 기술하는 창세기에 요한 계시록의 언어인 ‘종말’이라는 어구를 썼을까요?

‘예배’라는 것은 ‘종말’을 품고 있는 단어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떠난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던 이 세상의 ‘왕’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티끌에 불과한 자신들의 실존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 분께 순종하고 충성하며

자신의 삶을 의뢰하는 모든 행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딱 두 부류로 나누어 집니다.

‘자신을 예배하는 자’‘하나님을 예배하는 자’

타락한 아담의 후예들은 모두 다 자신을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중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생겼습니다.그 말은 이제 자신을 예배하는 자들이 어떤 무리와 완전히

구별되어서 심판의 자리로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이제 확연하게 선택을 맏은 자들과 심판을

받은 자들이 구별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모여 공적인 예배를 드리거나 아니면 삶의 처소에서 예배의 삶을

올바르게 살아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제 선택과 심판으로 갈라져 영원히 분리가 될 종말이 왔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되는 것 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하고 예배의 삶을 살게 될 때 세상은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께서 속한 각자의 처소에서 예배자로서의 올바른 삶을 살게 되면 세상의

악이 여러분의 선한 삶과 대조가 되어 폭로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심판입니다

여러분의 예배의 삶은 세상의 심판에 대한 근거 자료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여전히 자신의 자랑과 인기와 유익을 위해 여러분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험담하고 억압하는 자들에게

온유와 인내와 사랑으로 참아주고 당해주는 것이 바로 예배의 삶이고 그 삶이 그들의 죄를 심판하는 삶이 되는 것임을

절대 잊지 마세요

당하는 것이 이기는 삶입니다. 그게 심판을 하는 삶입니다.

 

(갈 4:28-29)

28.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그러나 그 때에 육체을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르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럿하도다.

 

그러니까 당하는 여러분이 승리자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역설을 꼮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예배와 예배의 삶은 하나님으 은혜 속으로 들어오게 된 선한 자들과 그 하나님의 은혜에서 제외된

저주받은 인생들을 정확하게 구분 짓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아벨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는 자,오늘 본문의 표현을 빌리면‘선을 행하는자’가 되었습니다.

가인은 여전히 자신을 예배하고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악인입니다

아벨의 선한 행위 즉 올바른 예배의 삶이 가인의 악한 삶을 폭로했습니다.

아벨이 가인을 가리켜 ‘넌 잘 못 사는 거야,너처럼 살면 안 돼’라고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올바른 예배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벨의 삶은 가인의 삶을 악으로 규정지어 심판하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예배가 있는 곳은 늘 종말이 선포되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세상을 심판하는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심판을 당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세월이 흐른 뒤에’라는 어구가 가진 의미입니다.

 

그렇게 예배를 통하여 죄가 지적을 당하고 어두움이 폭로되고 더러운 것들이 시궁창 밖으로

드러나게 될 때 그 곳에는 반드시 가라지들의 반란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성과 나약함을 지적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설파하는 복음을

못 견뎌 합니다.왜냐하면 올바른 설교는 항상 세상에 심판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공예배 시에 선포되는 목사의 설교가 모든 사람에 환영을 받는다면 그 설교는 빵점입니다.

그것은 설교를 통하여 심판이 선포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존 웨슬리 목사님은 평소에 ‘내가 말씀을 전한 뒤에 사람들이 나를 박대하지

않으면 내가 과연 복음을 전한 것이 맞는가 의심했다’라고 제자들에게 자주 말씀을 하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주님도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눅 6: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같이 하였느니라.

예배당 안에 모여 있는 사람들 중에는 기실 가라지가 더 많습니다

가라지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알곡들인 하나님 백성들의 신앙 성숙을 위해 일시적으로 도구로 쓰여 지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 가라지들은 하나님 백성들의 예배장소에 함께 앉아 있기는 하지만 도대체 두럽기만하고 껄끄럽기만 합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자기들은 이 세상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라고 믿고 있고 그렇게 살고 있는데 복음은 자기를 죽이고

자기를 비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라고 가슴을 후벼 팝니다.자기들은 여전히 남을 밟아 나의 유익을 챙기는

삶을 살고 있는데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데 그러한 삶을 사는 자들은 가인의 길에 행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저주를

피하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달가울 리 없습니다.그러니까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도대체가 못 마땅한

것이지요.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들에게는 심판을 선포하는 말씀이기에 못 마땅한 게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복음의 말씀이 달기만 합니다.

지금은 이세상에서 이렇게 악한 자들에게 당하고 얻어터지며 살고 있지만

그리고 여전히 이렇게 죄에 오염된 육체 속에서 치열한 신 구 세력 간의 전쟁을 겪으며

살고 있지만 이제 곧 하나님께서 우리의 새로운 몸을 완성시켜 주시고

원수의 목전에서 잔치 상을 베풀어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기에 아무리 들어도 또 듣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에서 열심히 분투하고 있는 교회의 형제자매들은 만나 그들의 무용담을 듣고 교제를 하는 교회의 모임을 너무 너무 사모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예배와 예배의 삶은 종말의 선포요 심판의 표효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