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질투 성도의기쁨과행복

2013. 9. 21. 20:25김성수목사님

106.질투,성도의 기쁨과 행복...

             사사기(23) - ‘에브라임의 죽음, 큰 용사 입다의 죽음, 역사의 죽음, 그리고 나의 죽음’본문중에서

 

나에 대한 주체성과 존재성을 버리지 못한 아담 군상들의 자기 영광 챙기기에서 발생되는

대표적 증상이 뭡니까? 질투입니다.

에브라임이 기드온 때나 입다 때 모두 그 놈의 질투 때문에 그런 억지를 부린 것 아닙니까?

인류 최초의 살인의 발생 동기가 뭡니까? 질투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왜 죽였나요? 질투 때문에 죽인 겁니다.

 

질투란? ‘왜 내가 너보다 가치 없는 자 취급을 받아야 하느냐?’에서 출발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왜 내가 너보다 더 융숭한 대접을 못 받느냐?’라는 이기적 감정에서 격발되는 것이 질투지요?

그러한 질투심에서 차등 상급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내가 상을 받아 너보다는 나은 대접을 받겠다는 것이 차등 상급론의 핵심이지요?

그래서 차등 상급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일도 열심히 하고 희생도 하고 봉사도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한 이들의 인간 행위에 대한 이해가 어떤 것이겠습니까?

인간의 행위는 가치가 있는 것이고 충분히 하나님께 상을 요구할 만한 무게가 있는 것이라는

전제가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에게 분노하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심장에 칼을 꽂을 능력은 없으니까

하나님이 자기보다 나은 자라 여기시는 자를 죽이는 것입니다.

사사기 안에서의 에브라임의 시기와 질투가 꼭 그런 것입니다.

자기들에게 미리 알렸으면 자기들이 하나님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영광이라는 상급을 쟁취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건 ‘영광’이라는 것에 대한 아담 군상들의 오해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관 안에서의 영광은 자기들의 힘과 능력이 전시되거나 자랑이 되었을 때에 타자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쉬운 말로 내 자랑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영광은 ‘나’라는 존재 안에서 기인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밖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신자의 영광은 자신의 자원과 재주와 소유와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넌 내꺼야’라고 선택을

해 주시는 것에서 기인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신자의 영광은 주님과 함께하는 것에서 주어지는 것이지

‘나’라는 존재에서 근거 되어 나오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류의 역사는 자신의 잘남이나 강함을 증명하고 자랑하여 자신의 영광을 취하려고 하는 힘의 철학

하에서 짐승처럼, 약육강식의 추악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서가 2장에서의 그 신상을 7장에서 이렇게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에게 신상으로 보여 졌던 것이 다니엘의 눈에 어떻게 보였는지 보세요.

(단7:4-8)

4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볼 사이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입었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으며

5 다른 짐승 곧 둘째는 곰과 같은데 그것이 몸 한편을 들었고 그 입의 잇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는데

   그에게 말하는 자가 있어 이르기를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으라 하였으며

6 그 후에 내가 또 본즉 다른 짐승 곧 표범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에게   또 머리 넷이 있으며 또 권세를 받았으며

7 내가 밤 이상 가운데 그 다음에 본 넷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하며 또 큰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숴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으므로

8 내가 그 뿔을 유심히 보는 중 다른 작은 뿔이 그 사이에서 나더니 먼저 뿔 중에 셋이 그 앞에 뿌리까지

   뽑혔으며 이 작은 뿔에는 사람의 눈 같은 눈이 있고 또 입이 있어 큰 말을 하였느니라

 

전부 입에 뭘 물고 있거나 씹어 먹고 있지요?

이 짐승들이 바로 이 역사와 아담 군상들의 실체인 것입니다.

약육강식, 그건 짐승의 본능입니다. 맹수의 본능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그 자리에서 빼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리들 앞의 양으로 보내져서 오히려 맹수들에게 먹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라는 사람들까지도 자신의 삶에 그러한 것들이 닥치게 되면 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아우성을 치지 그

것에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내가 무시되고 내가 부인되는 것이 잘 가는 것이란 말입니다.

육적 자아의 멸망!

그런데 그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면 자존심이 상하고 질투심이 일어나서 견디질 못하겠는 겁니다.

 

그렇게 우매한 자에 대한 예가 예수님이 주신 비유에서도 나타납니다.

그게 바로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의 비유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장터에서 놀고 있는 자들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해 아침 일찍 나갑니다.

보통 유대인들의 작업시간이 아침 여섯 시부터였다고 하니 주인이 제일 먼저 장터로 나간 시간은

새벽 여섯 시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홉 시쯤에 또 나가보니 역시 일자리가 필요한 품꾼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그들도 포도원 품꾼으로 채용을 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불러 모으다가 마지막에는 작업 종료 한 시간 전인 십일 시,

그러니까 지금 시간으로 저녁 다섯 시에도 품꾼을 불러 들였습니다.

그리고는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을 임금으로 지급을 한 것입니다. 그게 그 품꾼들에게 약속된 임금이었거든요.

그때 먼저 온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을 하는지 보세요.

(마20:10~16)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 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먼저 온 사람들이, 왜 내가 일을 많이 했는데 똑같은 보상을 해 주냐고 따집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내 뜻대로 내 맘대로 임금을 주겠다는데 왜 너희가 따지고 드느냐?’

야단을 칩니다. 자신들의 행위가 가치가 있다고 보는 이들의 시기요 질투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똑같은 임금을 준 것은 은혜요 ‘선’입니다.

그런데 자신과 자신의 행위에 가치를 부여하고 자신이 내어 놓은 것만큼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힘의 철학 하에 있는 자들은 주인의 그 행위가 악하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으로 보니까 그런 것입니다.

무엇이든 자신의 가치를 높여주고 자신의 삶에 유익이 되는 것은 모두 선이고

자신에게 불이익을 주고 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것은 다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바로 그러한 질투가 주인을 악하게 몰아붙이는 것이고 그런 자들은 다 나중 될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여기에서 나중 된다는 말은 1등이었던 자가 2등으로 밀려 내려 갈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지옥에 간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품꾼은 ‘엘가테스ἐργάτηςG2040’ 일용직 노동자를 가리킵니다.

                                                                                노동자,(상징적으로 교사,일군)

                                                  엘콘 ἔργονG2041에서 유래-‘노역’(노력 또는 직업으로서),행위,수고

하루 벌어서 하루를 살아야 하는 일용직 노동자에게 있어서 그 날에 주어진 일이란 자신과 가족의

생계 뿐 아니라 생명과도 직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포도원 주인은 품꾼들에게 일을 준 것이 아니라 생명을 준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품꾼들이 포도원에서 해야 할 일의 질이나 양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렇게 여러 번, 수시로 나가서, 심지어 한 시간 전까지 품꾼들을 모으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품꾼들에게 자신의 긍휼과 은혜를 쏟아 부은 것입니다.

포도원 품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이라는 생명의 삯을 지불하기 위해 오히려 주인이 더 바빴던 것입니다.

포도원 품꾼들은 임금이 정산되기 전까지는 저마다 기쁘게 일을 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 날의 생명에 필요한 임금을 받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임금 정산 과정에서 발생을 했습니다.

그때까지 즐겁고 기쁘게 일을 했던 품꾼들이 자신보다 덜 수고한 사람과 자신에게 똑같은 임금이

주어지자 분노한 것입니다. 왜 그랬지요?

나의 노동이 가치가 있다는 사고에서 출발한 분노입니다.

모든 포도원 품꾼은 포도원 주인의 은혜와 긍휼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날의 생명이라는 소중한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선물에서 눈을 돌려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힘, 그리고 다른 이들과의 비교와 차이를 바라보자

금방 분노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게 바로 에브라임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는 너나 할 것 없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그냥 그렇게 죽어야 할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순전히 은혜로 그들을 구원하셔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집어넣어 주셨습니다.

그 자체가 생명이며 복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가치와 힘과 영광에 눈을 돌리면서부터

시기와 질투와 전쟁이 끊이질 않는 것입니다.

자기들에게 주어진 진짜 복과 가치를 너무 소홀히 여겼던 것입니다.

이 비유가 어떤 이야기에 붙어 있는지 아세요?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은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마태복음 19장 후반부에 나옵니다.

그 부자 청년은 단순히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로 자신의 가치를 상승시킬 수 있다는

율법주의적인 사고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종류의 부자는 절대로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사도 베드로가 ‘그 사람은 부자라서 못 들어간다고 해요. 그럼 예수님을 위해 모든 걸 다 버리고

주님을 좇은 우리는 어떤 상을 받게 되나요?’하고 물었습니다.

(마19:27~30)

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보세요. 여기에도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똑같은 말이 나오지요?

그러니까 부자 청년의 이야기와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답이 포도원 품꾼의 비유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꼭 알아두셔야 할 것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간 부자 청년이나 나에게 무슨 보상을 해 줄 것이냐고

물은 베드로나 똑같이 예수님이 나중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 ‘부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바로 그 부자 됨, 자신의 행위를 가치 있게 여겨

그것으로 어떤 차등 있는 보상을 요구하는 그러한 자리에서 지속적으로 밀려 내려가는 과정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저 포도원에 들어가서 생명에 관한 일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으로 행복해야 합니다.

그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모르니까 그 일이 수고가 되는 것이고, 그것을 차등 있는 상급을 바라며,

그것을 위해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이가 그 생명의 일에 동참하게 하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며

기뻐할 일인지를 아는 이들은 일찍 불려 올수록 감사가 더하겠지요?

그 일이 자신의 생명에 관계된 일이니까요. 그런데 그 생명에 관심이 없는 자들은 자기의 행위와 자신의 가치에만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급이니 뭐니 하면서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은 가치와 영광을 쟁취하려 여전히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일한만큼 차등 있는 대우를 해 주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질서입니다.

하늘의 질서는 그것과는 다릅니다. 하늘의 질서는 긍휼과 은혜와 자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은혜 받은 자의 능력이나 업적이나 배경이나 조건이 개입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자본주의의 질서관을 가지고 하나님께

차등 있는 보상을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들에게 하늘의 질서인 은혜와 긍휼을

들이대시면 그들은 하나님을 살해하는 자로 돌변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리새인들 아니었습니까?

그 안에 가인이 들어 있고,

그 안에 에브라임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바로 우리의 여전한 죄성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늘의 질서를 사도 바울이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롬4:4-8)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보시다시피

우리를 포도원으로 부르신 하늘의 주인은 우리의 일과 행위에 관심이 있으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긍휼과 은혜와 자비를 부으셔서 생명의 나라로 거저 초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그 생명 안에서의 삶이 어떠한 모양으로 전개가 되던 생명으로

기뻐합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과의 소유의 차이나 명예의 차이 등에 별 관심을 안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기쁨과 행복은 상대와의 차등에서 오는 상대적인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게 힘의 원리로 움직여지는 세상의 질서입니다.

성도의 기쁨은 도저히 산 자가 될 수 없는 죽은 흙에 생명의 생기가 부어져 영생이 주어진 것에서

오는 절대적 기쁨이어야 하고 절대적 행복이어야 합니다. 그게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자신의 처음 자리는 죽은 흙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자신을 불러 주셔서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아는 자가

어떻게 다른 이들과 자신의 조건과 소유를 비교하여 질투를 하고 시기를 하고 전쟁을 일으킵니까?

그러한 삶을 노력해서 살아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로 만들어 내시기 위해 우리 안의 마귀를 수시로 폭로시켜 버리실 때 위장을 하거나 조작을

하지 마지고

‘아 나는 도저히 용서 받아서는 안 되는 죄인 중의 괴수인데 어떻게 나에게 생명이 주어졌는가?’

하고 자신에 대한 올바른 자아인식을 가지시란 말입니다.

우리 안의 에브라임은 반드시 멸망해야 합니다.

우리 안의 입다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승리인 것입니다.

그러니 순순히 죽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