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스스로 돌이켜

2014. 3. 10. 16:31김성수목사님

 

 

서울서머나교회

 

122. “스스로 돌이켜 ”‘ εις εαυτόν δε ελθών....

- 예수님의 비유(2).“아버지와 두 아들의 비유”본문기록...

 

(눅15:17-18)

17 이에(데δέG1161) 스스(헤아우투ἑαυτουG1438)(에이스είςG1519)

      돌이켜(엘코마이ἔρχομαιG2064)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여러분이 여기에서 주의하여 읽으셔야 하는 어구가 ‘스스로 돌이켜’라는 어구입니다.

이 개역 성경의 번역만 보면 마치 회개의 주도권이 둘째 아들에게 있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스스로 돌이켰으니까요?

그래서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이나 이슬람 교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도

얼마든지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은 바울에 의해 조작된 엉터리 복음이라고까지 이야기를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여기에서 ‘스스로 돌이켜’라고 번역이 된

‘에이스 헤아우톤 데 엘돈’이라는 어구를 직역을 하면

   εις εαυτόν δε ελθών

‘자기 자신에게로 왔다,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자기 자신을 거울로 비추어 보았다’라는 뜻입니다.

돼지우리에서 돼지들과 쥐엄 열매 쟁탈전을 벌이고 있던 그 둘째 아들이 어느 순간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비추어 보고, 자신이 돼지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누가 그에게 개입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자신의 죄 된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유일한 근거가 뭐지요?

누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가르치러 오십니까?

성령 하나님. 즉 하나님의 자녀가 자신의 죄인 됨을 자각하게 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아버지의 불가항력적 은혜에 의해서입니다.

이건 제가 추론해 낸 이야기가 아니라 문맥에 숨어 있는 내용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누가 복음 15장 전체의 결론 부분입니다.

누가 복음 15장은 하나의 주제로,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누가복음의 핵심장입니다.

성경주석가인 예레미야스가 누가복음 15장을 누가복음의 심장이라고 이야기할 만큼,

이 비유를 담고 있는 누가복음 15장은 복음의 핵심 내용을 풍성하게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장입니다.

거기에 예수와 십자가가 빠져 있다면 말이 안 되지요?

 

누가복음 15장의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하는지 볼까요?

(눅15:1~3)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지금 누가는 예수님의 사마리아 여행 내러티브의 거의 정 중앙에 이 비유를 배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1절에 등장하는 세리와 죄인들은 심지어 유대인들도 아닌, 유대인들의 가치관 속에서 개만도

못하게 여겨졌던 사마리아 사람들, 그것도 하층민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반기시더니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사마리아 여행에 동행을 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원망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원망의 내용이 담긴 2절에 쓰인 동사들이 전부 현재시제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이 습관적이며 반복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사마리아 여행에 동행을 했을 만큼 예수님께 호감을 갖고

있었고, 배움에 갈급했던 종교적 열심이 아주 대단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불평과 원망을 들으시고는 비유를 말씀하시는 데, 세 가지 비유를 연달아 붙여서 던지십니다.

저는 이 누가복음 15장의 비유를 네 가지 비유로 봅니다. 왜 그런지는 조금 있다가 설명을 해 드릴 것입니다.

그런데 겉으로 드러난 비유의 이야기가 세 가지로 나누어져 있는 듯 보이므로

제가 일단 세 가지라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3절의 ‘비유’라는 단어의 ‘수’에 관한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지금 세 가지 이상의 비유를 말씀하실 것인데,

누가는 3절의 비유라는 단어를 단수로 썼습니다.

그것은 지금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모든 비유가 하나의 비유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오늘 공부하고 있는 이 비유 앞에 두 비유가 더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잃은 양의 비유이고,

두 번째가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입니다.

잃은 양의 비유는 100마리의 양 중에서 한 마리를 잃어버린 목자가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를 버려두고

한 마리를 찾으러 갔다가 찾아와서는 잔치를 베푼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비유는 열 드라크마를 갖고 있는 아낙네가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리고는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그 한 드라크마를 찾고는 기뻐한다는 내용입니다.

첫 번째 비유에서는 양이 100마리입니다. 그 중 한 마리를 잃었다가 찾습니다.

두 번째 비유에서는 드라크마가 열 개입니다. 그 중 하나를 잃었다가 찾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비유에서는 두 아들 중 하나를 잃었다가 다시 찾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점층적인 수사기법을 동원하여, 양 100마리 중 하나를 잃었다가 다시 찾아도,

신부에게 귀중한 혼수품인 열 드라크마 중 하나를 잃었다가 다시 찾아도 그렇게 기쁜데

두 아들 중 하나를 잃었다 찾았을 때 그 아비의 기쁨이 얼마나 크겠는가를 점층적으로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짐승, 돈, 사람, 백, 열, 둘 이렇게 점층적이며 점강적인 개념과 숫자들을 동원하여 인

간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관심과 애정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이 세 비유는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뜬금없이 7절과 10절에서 그 비유의 이야기를 회개와 연결 시키십니다.

(눅15:7,10)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기쁨이 되느니라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잃어버린 양이, 잃어버렸던 드라크마가 주인을 찾은 적이 없습니다.

양을 잃어버렸던 목자가 나머지를 버려두고 그 잃은 양을 찾아 다녔던 것이고,

드라크마를 잃었던 여자가 등불을 들고 비로 쓸며 드라크마를 열심히 찾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주인에 의해 찾아진 것들이 ‘회개를 한 것’이라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을 하신단

말입니다. 회개의 주도권은 찾는 분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앞 두 비유에서 회개란,

찾아지는 쪽에서 생산해 내고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찾는 쪽에서의 열심에 관한 개념이라는 것을 도출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이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비유인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똑같이, 회개하는 어떤 자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살펴보았던 ‘스스로 돌이켜’‘에이스 헤아우톤 데 엘돈’이라는 어구는 히브리어와 아람어에서 회개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쓰였던 어구입니다.

그러니까 돼지우리 속에서 돼지 된 자신의 모습을 올바로 인식하고 자각하게 된 둘째 아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찾아짐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한 것이라고는 자기에게 주어진 제한된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행복과 쾌락을 위해서

돼지처럼 산 것밖에는 없습니다.

런데 어느 날 아버지의 마음이 그에게 임하여 그 자신이 자신의 돼지 됨을 바라보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문맥을 잘 고려하여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의 행복과 만족을 추구하며 사는 삶이 돼지우리 속의

돼지 같은 삶이며, 자신들이 추구하는 모든 세상의 힘들은 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는 것을 올바로 자각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저 사는 동안 지었던 몇 가지 죄를 내어놓고 눈물 콧물 짜는 게 회개가 아니란 말입니다

'김성수목사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3-2 목사님의 죄와의이야기 녹취기록...  (0) 2014.03.10
123-1 일용할 양식  (0) 2014.03.10
122-1 권한대, 파라칼레오  (0) 2014.03.10
121 가만두어라 "쉴레고  (0) 2014.02.18
120,:항상"기뻐하라  (0) 2014.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