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1 일용할 양식

2014. 3. 10. 16:32김성수목사님

 

서울서머나교회

123-1. “ 일용할 양식 ....

- 주기도문(4).“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본문기록...

 

(마6:9-1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오며,

10 나라가 임하게 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

11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또는 '일용할 양식' 또는 '내일 먹을 양식')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또는 '빚진 사람의 빚을 삭쳐 준 것 같이')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또는 '빚을 삭쳐 주시옵고') 용서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또는 '시험에 빠뜨리지 마시고' 또는 '시련의 때로 이끌지 마시고'),

악에서(또는 '악한 자')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괄호 안의 본문이 없음)’

 

인류의 역사상 가장 큰 실험은 아마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일 것입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모든 사람들이 능력껏 일하고 모든 사람들이 필요껏 쓰는 프롤레타리아 유토피아를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유토피아는커녕 70-80년 동안 실험한 끝에 공산주의가 남긴 것은 대 재앙 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반증하는가 하면 인간들이 자기들이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하나님을 떠난 뒤 자신들을 스스로 보호하고

자신들의 힘을 쌓기 위해 만들어 놓은 그 어떤 것으로도 스스로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 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바래야 하는 자들이며 이 땅의 유토피아가 아닌 하나님 나라를 구해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 볼 기도는 어찌 보면 이 땅의 것을 구하라는 기도처럼 보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만일 이 기도가 우리가 이해하는 이 땅에서의 우리가 필요한 양식을 구하는 것이라면

성경은 자체 내에서 심각한 모순을 갖게 됩니다.

 

같은 장의 25절을 보면 분명 그런 것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명확히 나와 있거든요.

(마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무엇을 마실까'가 없음) 걱정하지말고,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그렇지요? 그렇다면 성경이 각기 모순된 요구를 한 장에서 이야기 할 리는 없고 우리가 놓치고 있는 어떤 심오한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 심오한 뜻을 한 번 밝혀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성경을 잘 보시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의 ““일용할 양식””이라는 단어 옆에 풋 노트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혹 내일의 양식”” 이라는 말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일용할””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에피우지온επιουσιον”” 이라는

단어가 여러 가지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에피우지온επιουσιον”이라는 단어는 헬라의 어떤 문헌에도 쓰인바가 없는 아주 생소한 단어입니다.

 

성경에서도 딱 여기서 한번 쓰였습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도 이 단어에 대해 세 가지의 견해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에피우지온”이라는 단어를 “에피έπίG1909..위에...등”와 “우지아”의 합성어로 보고

“삶에 필요한”이라는 뜻으로 풀이를 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친숙한 해석이지요?

두 번째가 ““그날을 위한, 당일을 위한”” 이라는 뜻으로 풀이를 합니다.

세 번째가 ““오는 날에 필요한”” 혹은““다음날에 필요한””으로 해석을 하는 견해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세 번째 해석을 지지합니다.

그리고 제가 존경하는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거의 세 번째 견해에 의견일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아람어를 쓰셨습니다.

아람어는 바벨론의 언어인데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70년간 있으면서 그들의 일상 언어가 아람어가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히브리어는 유대인들의 학자들이나 쓸 정도로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잊혀 진 언어였습니다.

그런데 아람어 주기도문에는 “오늘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기본이라는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해설이 아무리 그럴 듯 하다해도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흐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세대주의자들이 해석을 할 때에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가는 사람이 도중에 강도를 만난다. 예루살렘은 천국을 말하는 것이고

사마리아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강도는 사탄이고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포도주와 기름을 부어 치료를 한다.

포도주는 예수님의 보혈을 의미하고 기름은 성령을 의미한다. 여관으로 데리고 가는데 그 여관이 교회이고

그 여관 주인에게 동전 두 개를 준다. 그것을 신약과 구약이라 하고 다시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간다.

그 것은 예수님이 재림을 하실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떠세요? 어찌 보면 딱 맞아 떨어지는 해석 같지 않으세요?

 

그러나 그 비유는 율법사가 예수님께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율법사에게 하신 대답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그 율법사에게 율법에 뭐라 기록되었느냐고 물으시자

그 율법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다고 정확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가서 그렇게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율법사가 누가 내 이웃입니까 라고 묻지요?

그 때에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론을 ‘누가 네 이웃인가 잘 정리하고 있어라. 네 입맛에 맞는 이웃 고르려 하지 말고

네가 다른 사람들의 이웃으로 살라’고 내려 주신 것입니다. 이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담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잘 못하면 성경을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임의로 해석하게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성경을 성경이 아닌 자기의 상식을 동원해서 푸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하는데 왜 제가 세 번째 해석인 ‘내일의 양식’을 지지하는가 하면 구약에서

내일의 양식을 오늘 주신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가 언제이지요?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6일 째 되는 날에 안식일인 다음날 것까지 주셨습니다.

왜 여섯째 날에 다음날 것까지 주셨습니까? 안식일에는 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기 때문에

일곱째 날에는 일을 하지 않고 여섯째 날에일곱째 날 것까지 거두고 안식일에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해 놓으신

온전한 창조를 기념하며 즐기고 종말에 이루어질 참 안식을 고대하라고 여섯 째날 다음날 것까지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여섯째 날 내일의 양식까지 주심으로 그 안식의 날은 반드시 온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신 것입니다.

안식의 날인 내일이 오지않을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굳이 내일의 양식까지 오늘 주실 필요가 없잖아요?

내가 벌써 내일의 양식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여섯째 날

일곱째 날의 양식을 소유함으로 일곱째 날인 안식일을 여섯째 날에 미리 누리면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구속사 적인 측면에서 주기도문에서 쓰인 ““내일의 양식””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쓰셨던 아람어 주기도문을 보면 거기 ‘마헬’이라는 아람어 단어가 나오는데 그 단어가 ‘내일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람어의 ““마헬””이라는 단어는 그냥 24시간 후의 내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오늘과는

다른 날, 즉 다가올 시대의 내일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 오는 날의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는 지금 바로 다가올 영원한 안식의 나라, 천국이 임하게 될 바로전인 종말을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며

이 땅에서 그 천국을 맛보면서 사는 자들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그 안식의 나라,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종말적 신앙론..그날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것……

우리는 다가올 내일, 즉 하늘나라를 살게 될 하늘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저 하늘의 것으로 먹고 마시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 나라를 통치하시는 왕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 나라를 준비하며 사는 자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 하늘의 양식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오늘 “내일의 양식을 우리에게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하는 그 하늘의 양식이 무엇인가요?

요한복음에 정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요6:27-35)

27 너희는 썩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여라.

       그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자를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28 그들이 예수께 물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

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30 그들은 다시 물었다.

       "우리에게 무슨 표적을(예수의 신성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으로서의 기적(그리스어 세메이온) ) 행하셔서,

       우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선생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31 '그가 하늘로부터 빵을 내려서, 그들에게 먹게 하셨다(출 16:4, 5; 시 78:24)' 한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3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빵을 내려 주신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부터 참된 빵을 너희에게

     내려 주시는 분은   나의 아버지시다.

33 하나님의 빵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인데,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34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 빵을 늘 우리에게 주십시오."

3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떡,그 삶에 동참하여 살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보시다시피 그 양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바라야 하는 그 내일의 양식인 예수는 어떤 예수입니까? 하늘 왕의 신분으로,

하지만 이 땅의 왕이 아니기 때문에 이 땅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핍박을 받으시고

그러나 지금은 하늘의 영원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그 예수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하늘의 양식인 예수를 바라며 예수를 원하며 ““나도 그렇게 살겠습니다.

나도 그 하늘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늘의 왕이 살다 가신 그 길을 나도 따라가겠습니다.””하는

신앙고백이 바로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인 예수를 주옵소서.’라는 기도문이 담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어떤 자들이 그런 신앙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그 하늘의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아는 자들만이 그러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후4:17-18)

17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룩해 줍니다.

18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이 그렇게 쉬운 것입니까? 아닙니다.

             - 말씀공부...고난,애통,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그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과

                                    그 고난이 세상에 어떻게 생명의 향기로 영광이 되어지는 것인가에 대한

                                   깊은 말씀들은 목사님의 설교를 참조 하시기를 소망합니다.(개인적 마음)

우리 눈에 보이는 이곳은 잠간이면 지나갈 것이지만 보이지 않는 저 천국은 영원한 곳임을 아는 자들,

그들이 ““오늘날 나에게 내일의 양식을 주옵소서. 그 예수를 좇아 살게 하옵소서. 하나님 그렇게 살겠습니다.”” 하고 기도하고 서약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오늘을 살지만 다가 올 내일, 즉 천국을 아울러 사는 자들이기에, 그 나라는 우리에게 임했기에,

그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져 있기에 내일의 양식인, 하늘의 떡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며

그 삶을 좇으며 살겠노라고 고백하며 서약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이지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삼박자 축복을 바라는 것이 기독교가 아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