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히브리 사람들의 “복,바라크( בּלק)”...

2015. 9. 25. 18:00김성수목사님

145.히브리 사람들의 “복,바라크( בּלק)”...

- 그런기독교는 없습니다. (41강) 교회와 복음...본문기록

 

(창12:1-3)

1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3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히브리 사람들은 그렇게 어떤 존재가 살아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생명력을 가리켜

““바라크( בּלקH1110)”” ““복””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복의 개념하고는 완전히 다릅니다.

창세기 1장22절에 하나님께서 새와 물고기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라고 합니다.

 

(창1:22)

하나님이 이것들에게 복을 베푸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여라.

새들도 땅 위에서 번성하여라" 하셨다.

 

새하고 물고기한테 무슨 복을 주신 것입니까? 재물을 주셨나요? 자식을 많이 낳게 해 주셨나요?

좋은 대학을 들어가게 해 주셨나요?

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께서 어떤 존재를 만드실 때 그 존재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존재로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새에게 있어서 복은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의도하신 대로 하늘을 잘 날아다니면 ““복을 받은 것””입니다.

물고기가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물에서 잘 헤엄쳐 다니면 그 존재는 복을 받은것입니다.

그래서 새와 물고기를 만드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존재가 존재하게 되는 ““생명”” ““복”” “바라크( בּלק)””라는 것은 누가 주십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복을 받았다”라는 말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라는 말은 정확하게 동의어입니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복으로 말미암아 행복하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네페쉬נפשׁ)에게 주신 복, 그 생명력으로 말미암아 파생되는 것을

부유함이라든지, 건강이라든지, 자식이 많아지는 것이라든지, 오래 사는 것으로 표현을 해 놓은 것입니다.

분명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의 결과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고 잘 들으세요.

사람들은 그런 것이 있으면 잠깐이지만 행복해 합니다.

그런데 그 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에만 참 복인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복을 받았다는 말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말이 정확하게 동의어라고 했지요?

그래서 복은 하나님이 함께 계실 때 참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자 하나님께서 떠나가 버리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바로 죽여 버리지 않으시고 인간에게 여전히 한시적인 생명력은 남겨두고 떠나버리셨습니다.

그래서 그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복의 파생물인 복의 모양이 나타납니다.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들으세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인간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라는 의도하심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네페쉬נפשׁ)””에게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살아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 그것이 바로 ““복””입니다.

그것을 그들은 생명이라고도 표현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타락을 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떠나셨습니다. 원수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주시면서 약속하신 대로

““너희가 이 선악을 알게 하는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하신 그 죽음을 향해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인간을 떠나 버리셨지만 육체적인 생명을 끊어버리지는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를 금방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의 사상에서는 그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그들에게는 자기 존재 안의 생명력이 모두 쏟아져서 시체가 되어지는 그 곳을 향해 가는 과정이

모두 ““죽음””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갈라져서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참 복을 잃었습니다.

왜요? 참 복이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복음 비로소 참 복이 된다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을 향해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에게는 한시적인 생명력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력에서 생기는 부와 건강과 장수 같은 것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것은 하나님이 떠나버린, 죽음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소멸되어 가는 복의 모양일 뿐입니다.

그렇게 소멸되어 가고 불타버릴 것들을 우리는 진정한 복이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떠난 복의 모양들은 제로섬의 법칙 아래 있게 됩니다.

누군가가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저기 저편의 누군가가 가난해지게 되어있습니다.

누군가가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밟아야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시험에 붙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떨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복이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떠난 그 모든 것들은 ““악””인 것입니다. ““죄””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죽어 가는 이 세상, 우리 주변에 풍요한 사람, 건강한 사람, 멋진 사람들을 두어서

우리로 하여금 부러움으로 몸서리치게 하시는지 아십니까?

참 복을 회복한 자가 누릴 것은

““너희가 지금 부러워하는 것을 다 합쳐서 거기다가 억만 배를 곱한 것 이상의 행복이다””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참 복을 받은 자들은 그 어마어마한 것들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거기서는 제로섬의 법칙이 없습니다.

모두가 풍요하고 모두가 왕입니다.

모든 교회가 예수님과 함께 만물을 다스릴 것입니다. 우리는 그 참 복에 대한 힌트만 얻으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그렇게 ““죽음을 향해 갈 수밖에 없는 자”” ““죽은 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껍데기뿐인 복을 진짜 복인 줄 알고 착각하며 희희낙락(喜喜樂樂)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모두 불타 버릴 것들이지요.

그 복을 잃은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무리를 택하셔서 다시 그 진짜 ““복””을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이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는 ““그 죽은 삶””을 살고 있는데 어떤 자들을 살리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 처음 시작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시는 곳이 바로 오늘 본문인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갈대아 우르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아브람에게 찾아가셨습니다. 오늘날 이라크 지방이지요,

이미 그 때 당시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던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그 역시도 풍요는 누리고 있었지만 우상을 만들어 팔던 죽어 가는 자, 죽은 자였습니다.

그에게 찾아가셔서 내가 복을 줄 테니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의 개념으로 보면 아브람은 이미 충분히 ““복””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복을 줄 것이고, 너를 복의 근원으로 만들겠다고 하시고는

삭막한 광야로 내 모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삭막한 광야로 내 몰린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며, 복 받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눈에 보이는 풍요와 안락함을 주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건져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의 번영과 번성을 주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비옥한 갈대아 우르와 삼각주 땅인 애굽에서 건져내셔서

먹을 물도 제대로 없어서 바닷물을 끓여 먹어야 하는 가나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십니다.

무엇을 주시려고요? 복을 주시려고요. 진짜 복을 주시려고요.

 

아까 히브리 사람들의 복의 개념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셨을 때 의도하신 대로 충만한 생명력을 가지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을

복이라 한다고 했지요?

바로 그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조금 못 배우고 못 살고 못 생겼다고 해서

““아이구, 지지리도 복도 없는 놈”” 하면 그 사람은 성경이 말씀하고 계시는 ““복””이 뭔지 정말 모르시는 겁니다.

 

산상수훈을 한번 보겠습니다.

(마5:3-10)

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것이다.

5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7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자비함을 입을 것이다.

8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9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우리가 산상 수훈을 보는 관점을 조금 달리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산상 수훈을 볼 때에 복 있는 자는 애통해야 하고, 마음이 가난해야 하고, 마음이 청결해야 하고,

핍박을 받아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는 것 보다 ““누가”” 복을 받을 수 있느냐의 관점으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세상 적인 시각으로 볼 때 애통하고, 마음이 가난하고, 핍박을 받고, 그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천하에 복도 없고 재수 없는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그가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복 받은 사람일 수 있다는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나는 구원받았는데 왜 마음이 가난하지 않지? 나는 구원받았는데 왜 마음이 청결하지 않지?

열심히 노력해야해““ 이런 짐을 지우려는 것이 아니라

 

복이라는 것은 너희가 생각하는 이 세상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시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자비하게, 깨끗하게, 청결하게, 온유하게 살면 세상에서는 바보 취급을 당합니다.

사업을 할 때 온유한 마음으로 사업을 하면 손해를 보기 마련입니다.

자비를 베풀면 어차피 자기 것에서 나누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자기의 소유가 줄어드는 것입니다.

의에 주려하면서 의롭게 살려고 하면 ““그래 너 잘났어.”” 하는 소리밖에 못 듣습니다.

한마디로 산상 수훈의 내용처럼 살면 세상에서는 바보 취급받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그렇게 바보 같고, 슬프고, 애통하고, 미련해 보여도 그는 복 받은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배워야 하는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지지리도 복도 없는 인간””이라고 섣불리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요? 복이라는 것은 이 땅의 풍요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 받은자로 완벽한 삶을 살다 가신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의 삶이 어떠셨나요? 이 땅에서 풍요와 번영을 누리다가 가셨나요?

성경의 복은 우리가 태초에 지어진 그 복 받은 자로 회복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의도하신 대로 순종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늘의 모든 것을 누리게 되는 것을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128편:1)

주님을 경외하며, 주의 명에 따라 사는 사람은, 그 어느 누구나 복을 받는다.

 

무엇이 복이라고요?

여호와와 관계가 회복되어 그 분을 알아보고 그 분의 크심을 알게 되고, 그 분을 경외하며, 그 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게 되는 것을 우리는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