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 성경이 말하는 의 (쟈다크(צךקה) 라는 것.. ”....

2015. 9. 25. 18:03김성수목사님

146. “ 성경이 말하는  (쟈다크(צךקה) 라는 것.. ”....

                  - 그런기독교는 없습니다. (41강) 교회와 복음...본문기록

 

“의”라는 것은 무엇인지 공부하겠습니다.

우리가 ““의””하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면으로 많이 해석을 하지요?

성경이 말하는 ““의””는 그런 의미와는 조금 다릅니다.

성경은 타락한 모든 인간을 가리켜 불의한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지옥에 간다면 ““불의””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벧전3:18)

 

그리스도께서도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 결정적으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곧 의인이 불의한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고난을 받으신'). 그것은 그가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셔서,

여러분을(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불의(不義)””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히8:12) 나는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더 이상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

 

도대체 ““의””가 무엇이고 ““불의””한 것이 무엇이기에

그 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셨어야 했는가 말입니다.

그 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15장으로 가야합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 창세기 12장의 내용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을 해 주십니다.

네 자손이 저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될 것이라고 하시니까 아브라함이 믿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 칭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면서 그를 의롭다 칭해 주십니다.

 

(창15:6) 아브람이 주를 믿으니, 주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아브라함이 이 장면에서 무엇을 했기에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셨습니까? 아브라함이 죄를 멀리하고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하나님의 정하신 수준까지 잘 살아냈기 때문에 그가 의롭게 된 것입니까?

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면서 거기서 의를 이야기하실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서구 사상의 영향을 듬뿍 받은 ““의””가 뭡니까?

어떤 도덕적 윤리적 수준을 정해놓고 거기에 맞게 살아내는 것을 우리는 의롭다고 하고

그 수준에 못 미치는 것을 불의 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조차도 ““의”” 하면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사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가 없어졌고

그래서 우리는 ““의””를 얻었다““라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의””라는 것은 그런 서구의 사고에서 나온 “의””“justice"와는 많이 다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의에 대한 개념은 이러합니다.

네페쉬, 존재는 항상 관계를 갖고 살게 됩니다.

네페쉬와 네페쉬와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 네페쉬는 그런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 관계의 대상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부모 자식 간의 관계에서는 부모가 자식에 대해 기대하는 것이 있지요?

마찬가지로 자식은 부모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순종을 해야 하고 부모는 자식을 보호하고 양육해야 합니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떤 요구가 있습니까?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분을 의지하고 의뢰하며 살아가야 하고 하나님은 그 인간을 보호하시고

사랑하시는 관계의 요구가 있습니다.

바로 그 관계가 요구하는 바대로 살아 내는 것, 그 관계에 걸 맞는 행위를 하고 그 관계의 대상이

원하는 대로 살아 주는 것을 ””의““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의””라고 하는 것이 이상한 데에 쓰일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유다의 며느리인 다말이 시아버지인 유다를 속이고 후사를 얻기 위해서 시아버지와 동침을 합니다.

그런데 유다가 나중에 며느리가 후사를 얻기 위해 그랬다는 것을 알고 ““네가 나보다 의롭다””

히브리어로는 ““짜다크(צךקהH6666)””라고 이야기합니다.

다말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는 화형에 처해질 일을 했습니다. 유다가 화형을 해버리려고 하지요?

그러나 다말은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 속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의롭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라고 말할 때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고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완전하신 분이시다””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대상과 맺은 언약의 관계를 끝까지 지키신다.””는 말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그 언약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역할을 실패치 않으시고 끝까지 해 내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로 묶여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를 보이십니다. 어떻게 보이십니까?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몰살시키십니다.

이스라엘 이외의 다른 민족들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는 분처럼 대하십니다.

그런데 히브리 사람들은 그것을 ““의롭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사사기5장에서 하나님께서 가나안 왕 야빈과 시스라와 그의 군대를 모두 몰살시키신 후에 드보라가 찬양을 합니다.

이른 바 ““드보라의 노래””입니다. 거기에서 드보라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가리켜 ““의로우신 일””이라 합니다.

우리의 의에 대한 개념으로 따지면 어떻게 어린아이, 부녀자까지 모두 몰살시키는

하나님을 ““의롭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히브리 사람들의 의에 대한 개념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네페쉬 들이 그 관계에서 요구되는 삶을

성실하게 살아내는 것을 ””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그 ““의””에는 관계 당사자에 대한 이해와 순종과 경외감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타락을 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셨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복을 잃어 버렸고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게 된 사망의 지배를 받는 죽은 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브라함도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가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고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아보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그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힘에 의해 그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순종을 하게 된 것입니다.

““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관계가 요구하는 것을 아브라함이 순순히 따르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의로 여기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까?””하고 질문하실 분이 계실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의도가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을 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렇게만 하면 우리는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었습니다.

(신6:25)

우리가 주 우리의 하나님 앞에서, 그가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충실하게 지키면,

그것이 우리의 의로움이 될 것이다.'"

 

그 언약은 인류의 대표인 아담에게 하셨지만 우리 전 인류에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언약을 어겼다고 말씀하십니다.

(호6:7) 그런데 이 백성은 아담처럼(또는'아담에서' 또는 '사람처럼') 언약을 어기고 나를 배반하였다

 

아담은 그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에서 자신이 해야 할 몫을 해내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불의””라고 이야기합니다.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네페쉬””가 그 관계에서 요구되는 행위를 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불의하다””고 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우리는 불의한 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불의한 자들 중에 어떤 무리를 ““의롭게”” 만드시기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원래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의 관계가 요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회복을 시키시기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첫 모델을 바로 아브라함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미 타락을 했기 때문에 인간이 다시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인간을 의롭게 만드시는데 그 것을 아브라함에게 미리 보여 주십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될 것이다““하고 하시고

아브라함이 그것을 믿자 그를 의롭게 여기십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어떻게 이루실 것인지를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시는데 제물을 쪼개놓고 하나님께서 언약을 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홀로 그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십니다.

 

히브리 사람들 언약, 계약을 할 때 쪼갠 고기 사이로 언약의 당사자가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게 되어 있다고 했지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원래의 하나님과의 관계로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죽이시기로 결정하시면서 까지 그 언약의 관계를 지켜내시기로 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목숨을 끊으시겠다는 결정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하나님은 그 약속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 언약은 끝까지 지켜진 것입니다.

 

(히6:13-14)

13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당신보다 더 큰 분이 계시지 않으므로, 당신 스스로를 두고서 맹세하여

14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을 주고, 너를 번성하게 하겠다"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목숨을 걸고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롬4:25)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시고, 또한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롬3:24)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다가 우리를 붙여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의 목숨을 끊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과 관계회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의롭다 하심을 입는다.””는 말의 진의 인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목숨을 끊으시면서 까지 언약 관계 당사자들을 건져내시는

그 하나님을 우리는 ““의롭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전 인류를 다 건지시지 않으셨나?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 절망에서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고요.

 

(롬5: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롬4:2-3)

2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그에게는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3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움으로

     인정하여 주셨다" 하였습니다.

(갈3:6-7)

6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더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에게 의로움으로 여겨 주신 것"과 같습니다.

7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아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를 선물하시는 데에 다른 방법을 쓰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 붙여 놓으신 줄 아십니까? 그것은 다시는 그 ““의””의 상태가 ““불의””의 상태로 되지 않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 붙여 놓으신 것입니다. 아예 연합 시켜버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타락할 수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영원히 그 ““의””를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라고 하시는 대로 영원히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시는 타락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이제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에게 요구하시고 의도하신 내용을 지켜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명령이지요? 우리가 문화 명령이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바로 이 요구가 복을 받고 의롭게 되어진 영생을 얻은 자들에게 다시 요구되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거든요.

(마28:19-20)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이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어하늘나라를 선포하라.

하나님을 증거 하라 ““복음으로 그들을 정복하고 다스리라”” 고 지상 대 명령이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하신 대로 완전하게 재창조되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 나라를 자랑하고 그 나라만을 소망하며 그 나라로만 위로를 받는

참 복을 받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 교회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죽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살았다는것이 무엇인지, 복이 무엇이며, 생명은 무엇인지, 의는 무엇이며,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 은혜와 사랑의 깊이를 아시겠습니까?

그것을 아시는 분들을 그리스도인이라 하는것입니다.

그 들은 바로 이 복음으로만 위로를 받습니다. 다른 위로는 거절하는 자들입니다. 그것들은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곧 소멸되어버릴 것이고 불 타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 복음이 돋을새김으로 양각되어 있으면 된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 복음을 더 깊이 더 명확하게 여러분 마음속에 새겨 드리기 위해 수많은 설교를 던지는 것입니다.

교회인 여러분,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생각할 때에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것 같다”” 고

느낄 만큼 힘이 들 때에도 여러분은 이 복음 만으로 기뻐하시고 행복해 하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감옥에 있을 때 찬양을 하고, 실컷 두들겨 맞고 나오면서 하늘을 보며 기뻐했다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가지고 있었던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여러분이 정말 아시게 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시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지금 여러분을 초대하고 계십니다.

(요5:24-25)

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의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

      심판(또는 '정죄')을 받지 않는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다.

25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듣는 사람은 살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생명과 복과 의가 무엇인지 ,

우리는 어떤 지경으로 떨어져야 할 존재인지 그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

선포가 되었습니다. 그 말씀을 받아들이십시오. 예수를 믿으십시오.

죽은 자들이 생명의 말씀을 들을 날이 오나니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예수님의 그 초청을 받아들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