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연단,‘도키메δοκιμή’”....

2015. 11. 29. 16:14김성수목사님

154. “연단,‘도키메δοκιμή’”....

           - 로마서(46)꿈이 나인가? 내가 꿈인가? ...본문기록

 

(롬5:3-5)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오늘 본문이 그 환난은 인내를 낳는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그 인내가 뭐겠어요?

여러분이 지금까지 배워 온 것처럼 그 어떤 고통에도 흔들리지 않는 맷집으로 견뎌내는 것을 인내라고 하나요?

정말 여러분이 겪은 환난이 여러분의 인내를 낳아주던가요?

여러분은 환난을 통과하고 난 뒤 뭐든지 참을 수 있는 자로 변화가 되셨어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인내’라는 단어가 요한계시록에 똑같이 나오는데 거기로 가면

그 인내가 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계14:12~13)

12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13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 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인내가 뭡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죽여 가시는 그 역사 속 인생길에서 예수 믿는 믿음을 굳게 붙들게 되는 것을

성경이 ‘인내’라고 해요.

그래서 사도 요한이 그 인내라는 단어를 똑같이 사용해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 하는 것입니다.

(계1:9)

9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여기에서 ‘참음’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오늘 본문의 ‘인내’라는 단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사도가 자신을 예수의 환난에 동참한 자요, 예수의 나라, 즉 예수의 통치에 동참한 자이며,

예수의 참음에 동참한 자라고 소개를 합니다.

예수님의 참음이 뭡니까?

죽으면서까지 하나님의 뜻에 이끌려 사신 것입니다. 그게 인내이며 참음입니다.

 

그러한 성도의 인내에 대한 설명이 가장 잘 설명된 곳이 계시록 2장의 서머나 교회에 대한 설명입니다.

(계2:8~10)

8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9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블라습헤미아βλασφημίαG988)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

10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서머나 교회에게 ‘처음이요 나중이시며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

-영원한 현재,예수님의 십자가, 즉 예수님이 말씀을 하십니다. 서머나 교회의 환난과 궁핍을 주님이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환난이 어떤 환난입니까?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블라스페미아βλασφημία: 악담, 조롱)입니다.

자칭 유대인은 누구지요? 유대주의를 총칭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능성 발휘와 증명, 인간의 자기 확장이 인생과 역사의 목적인 양 으스대는 무리를 총칭하는 것입니다.

선악과 따먹은 아담들이 다 거기에 속합니다.

그들이 예수의 죽었다가 살아나심의 은혜, 십자가의 은혜를 붙들고 있는

서머나 교회에게 환난과 고난을 안겨 주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이름이 서머나 교회지요?

우리가 지금 무엇으로 환난을 받고 있나요? 착하디착했던, 아니 착함의 옷으로 근사하게 위장을 했던,

바리새인 같은 율법주의자들의 공격으로 환난을 받고 있잖아요? 성경대로 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들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세요. 죽도록 충성하래요. 끝까지 네가 믿는 십자가의 예수만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게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입니다. 그 어떤 회유와 협박에도 절대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십자가와 예수 믿는 믿음만 붙들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한 마디로 잘 죽으라는 말입니다.

죽을 때까지 참으라는 말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살려 두며 유대주의의 공격을 받게 할 것이니까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예수만 붙들고 그들에게 잘 맞아 죽으라는 말입니다. 잘 보세요. 예수님께서 환난과 궁핍을 안다고 하셨으면서

장차 또 환난이 온다고 하시잖아요? 환난을 당하는 교회에게 ‘이제 내가 알았으니 다 막아 줄께’가 아니라

‘이것보다 더 큰 환난이 온다. 죽을 것 같은 고통으로 올 것이다.

그러나 넌 끝까지 믿음을 지켜라.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인간의 실체와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의 역할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얻기까지 살아있는 기간을 성경이 인내라 합니다.

내 능력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 그를 붙들고 죽지도 못하게 목적지로 끌고 가시는 것을 인내라 합니다.

 

야고보서로 가면 그 인내가 무엇인지가 더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약5:10~11)

10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11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야고보 사도가 주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살다간 선지자들로 고난과 인내의 본을 삼으라고 하면서

욥을 그 예로 듭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욥은 뭐 대단하게 참은 게 없어요.

조금 참는 듯하다가 금방 자신의 태어난 날까지 저주를 했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욥의 인내가 뭡니까?

욥은 하나님의 처사를 불공평한 것으로 인식하고 하나님께 대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비와 긍휼로 끝까지 욥과 함께 하시며 결국 욥을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죽은 흙으로 폭로시켜 내십니다. 급기야 욥이 ‘제가 이제 입을 닫겠습니다.’하고 항복을 하지요? 그렇게 욥의 육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난 아니네요. 난 너무 성급히, 주신분도 하나님이요 거두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니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고백을 멋들어지게 해 버린 거네요. 저는 저의 실체를 너무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이게 욥의 죽음입니다.

욥의 확실한 자기포기이며 올바른 자기 확인입니다. 그래서 욥기가 욥의 멋진 고백으로 시작이 되는 것이고

그의 근사한 율법 행위들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걸 바라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해 드리는 것임을 확실하게 밝히는 것이 욥기란 말입니다.

그렇게 욥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처음 자리를 올바로 자각하게 될 때까지

그를 지켜 내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인내’라 합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성도의 환난에서 낳아진다는

‘인내’는 성도의 인내가 아니라 성도를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발견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게 ‘환난은 인내를 낳고’인 것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원래 성도는 환난을 겪을 자격도 없는 자들입니다.

환난은 있음이라는 존재에게만 감지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없음이 무슨 환난을 겪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없음에 불과한 자들에게 있음만이 겪을 수 있는 환난을 겪게 해 주시는 것은 어찌 보면 은혜인 것입니다.

성도는 그러한 은혜로서의 환난을 통과하면서

그 환난도 과분한 자신의 처음자리, 자신의 실체를 반드시 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벧전4:1-2)

1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2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보세요. 육체의 고난은 있음의 주체이신 예수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께서 환난을 통과하심으로 죄를 없이하셨다는 것입니다.

1절의 말씀은 고난을 통과한 자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고난을 통과하신 예수님께서

당신 백성의 죄를 없이하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일어난 결과가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그건 단순히 착하게 잘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절대 의존의 삶을 살게 되는

성도의 견인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도대체가 인간의 가치와 영광을 챙길 수 없게 이끌려 가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래서 환난입니다. 그래서 고난입니다.

그러니까 인내는 내가 참아내는 기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죽지도 못하게 붙들고서 목적지까지 결국 끌고 가셔서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시는 그 기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인내입니다. 그러니까 인내도 결국 내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고난이 인내를 낳고 그 인내가 연단을 낳는다고 하지요?

그 연단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 ‘도키메δοκιμήG1382’는 사실 ‘증거’라는 뜻입니다.

환난이라는 시험을 통과하여 남게 되는 증거가 ‘도키메δοκιμή’입니다.

그러한 연단의 내용은 베드로전서1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벧전1:7)

7너희 믿음시련이(도키미온δοκίμιονG1383)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칭찬과 영광과 존귀얻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서 ‘시련’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연단’이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시련이라는 것 믿음이 만들어낸 증거물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금보다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연단을 불로 다 태워서 파괴해 버리고 남은 증거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 제련에 사용되는 용어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연단하여’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파괴하다, 다 태워 버리다’라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연단이라는 것은 불로 다 태워서 순전한 것만 남겨진 그 상태,

즉 ‘이것이 순전한 진짜 이다’라는 증거를 가리키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로 태워서 결국 남게 되는 진짜 핵심을 설명하는 내용이 고린도전서에 나오지요?

(고전3:10-17)

10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 할지니라

11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

12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16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 하느뇨

17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 하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그 성전인 교회가 어떠한 기초 위에서야 하는 지를 설명하는 것이 바로 이 공력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모든 공력을 불로 다 태워서 결국 남게 되는 게 뭡니까?

예수라는 터와 예수가 세우신 집입니다. 그게 연단입니다.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앞에서 역사와 인생이 모두 부정당하는 형국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라는 터 위에 예수가 지으신 성전,

즉 예수의 십자가 공로로만 지어진 성전 안에만 거하신다는 말입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성전인 걸 모르냐?’라고 교회에게 일갈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인데 왜 거기에 너희의 제사와 율법지킴과 행위의 근사함으로 덕지덕지 덧칠을 하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모든 구원을 불 가운데서 얻는 구원이라 칭하는 것입니다.

다 태우고 예수만 남겨 다시 집으로 데리고 가시는 것이 불 가운데서 얻는 구원인 것입니다.

17절을 보시면 그렇게 예수가 터를 놓으시고 예수 홀로 지으신 성전을 인간의 자존심 챙기기로 더럽히지 말라고 하잖아요?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지 말라는 말은 단순히 술 먹고 담배 피우고 나쁜 일 하고 해서

하나님의 성전다움을 잃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가 홀로 세우신 하나님의 성전에 함부로 인간의 행위로

못 질하지 말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성전 측량의 사건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성전 측량의 사건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60강해)

(계11:1-2)

1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척량하되

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이게 지금 사도 바울이 말한 그 성전이거든요.

성전은 여러분이 요한계시록 강해를 통하여 이미 배우셨던 것처럼 하늘의 성전 새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성전인 새 예루살렘은 바로 우리 교회를 말하는 것이고요.

‘나’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을 척량하라는 것은 그 성전이 제대로 된 설계도에 의해 제대로 된 재료로 잘 지어진 것인지를 살펴보라는

말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설계도에 의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재료로 지어지지 않았다면 다 부수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지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부수어 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의 은혜로 지어지는 성전이어야 하는데 이스라엘이 그 성전을 제사와 율법 등의

인간들의 열심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파괴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진짜인지 아닌지 척량을 당하는데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라고 하지요?

그 기간이 마흔 두 달입니다. 그건 삼년 반인 것이고 그게 이 역사의 기간입니다.

다니엘서의 70이레의 이야기 공부할 때 배웠지요? 성전 밖 마당은 세상을 가리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밖으로 쫓겨나서 살아야 할 역사라는 장소가 성전 밖 마당인 것이고

그 역사의 기간이 마흔 두 달입니다.

성전 밖 마당은 척량 당하거나 시험 당할 필요가 없어요. 원래 아니니까요.

성전만 척량을 당해요. 성전 밖 마당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참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그 교회만 척량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 척량이 짓밟힘을 당하는 환난으로 감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성전 척량 사건은 에스겔서 40장의 성전 척량 사건에서 모형으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전이 다 무너진 곳에 하나님이 새로운 성전을 환상으로 보여주시고 그 성전을 척량하라고 하지요?

성전은 이스라엘의 열심으로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으로 지어지는 것임을 확실하게 보여주신 것이 에스겔서의 성전척량 사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에스겔을 인자라고 부릅니다. 인자는 예수님의 별명입니다.

에스겔이 예수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자로 재어서 예수의 십자가라는 재료로, 예수에 의해 지어진 성전 아니면 다 부수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속에서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의 증거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부수어 지고 깨져서 결국 예수의 은혜와 십자가만 오롯이 남는 것,

그게 ‘인내는 연단을 낳고’인 것입니다.

그러한 증거가 히브리서 11장에 장황하게 설명되어 있지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면서

그 증거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죽 나열 되잖아요?

거기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사람이 아벨입니다.

자신의 제사를 지키기 위한(율법) 가인에게 하벨(vanity, nothingness)가 되어서 죽는 아벨의 이야기가 그 증거의 시작입니다.

그렇게 역사라는 꿈속에서 죽음으로 드러나게 되는 증거, 그것이 인내가 낳는 연단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바로 그러한 성전 척량의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열심히 성전을 짓고 있었는데 결국 그게 십자가 앞에서 인간들의 바벨탑으로 드러나 버린 것입니다.

그랬더니 세상이 그 분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게 십자가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그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뭐하라고 보내십니까? 세상에 나가 하늘의 자가 되어 세상을 척량하라는 것입니다.

계시록에서도 그 성전 척량의 일을 누가 하나요?

성도가 말씀이라는 책을 받아먹고 성전 척량을 합니다.

그리고는 그가 두 증인으로 바벨론에서 죽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예수의 역사 속 역할이 우리에게 그대로 유전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예수의 십자가라는 하늘의 자를 가지고 나를 척량하고 세상을 척량하면서 내 안에서 일차적으로 죽고,

세상에게 맞아서 이차로 죽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절감하는 ‘나’가 내 안에서 죽는 ‘나’이고, 그 은혜의 필연성을 삶으로 입으로 전파하면서

세상에게 무시 당하고, 조롱받으며 죽는 것이 세상에서 죽는 ‘나’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쇠도 녹이는 불이 절절 끓는 지옥의 도가니가 맞는 것입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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