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하나님께서 제정해 놓은 일반 법칙이라는 것 ”

2015. 9. 25. 18:27김성수목사님

149. “하나님께서 제정해 놓은 일반 법칙이라는 것

            - 에베소서75 자녀들아,부모들아...본문기록

 

(엡6:1-4)

1 자녀들아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우리는 지난주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부““에 대한 정의를 성경을 통해 공부했습니다.

결혼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자기들끼리만 한 편이 되어서 자기들만의 행복을 추구하며 탐욕스럽게 살라고

천국에는 있지도 않은 결혼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가 어떻게 살게 될 것인지를 미리 맛볼 수 있는

천국의 연장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며, 많은 실패와 좌절과 다툼과 아픔을 통과하며 그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이 땅에서 훈련하고 연습하는 영적 훈련소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가정에서 남편에게 순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는 연습을 통해 자신의 거룩을 빚어 가는 것이며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우리 주님께서 원수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던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훈련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워 가는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일들을 열심히 해 나가다가

혹 실패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거기서 나의 불가능함과 추악함을 정확하게 인식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께

더욱 더 매달리게 되는 것이며 간혹 그 복종과 사랑이 성공적으로 나타나게 될 때

““아, 천국은 이런 것이구나.””하고 우리는 천국의 비밀을 조금 씩 벗겨 보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은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결혼에 적극적으로 관여를 하십니다.

 

(막10:6-9)

6 창조 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 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 할지니라 하시더라

 

모든 결혼은 누가 짝 지어 주신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짝 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복음을 정말 정확히 알고계시며 결혼의 의미를 정확하게 깨닫고 계신 분들이 맞다 면

결혼은 신중에 신중을 더해야 하고, 고민에 고민을 더 해야하고 목숨 걸고 기도해야 하는일생일대의 중대한 것이라는 걸

인식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일단 결혼을 했으면 하나님의 뜻이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그 결혼을 통해 하나님께서 목적하고 계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순교하는 마음으로 그 가정을 지켜내는

 것이 올바른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생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 생활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모든 동화의 끝이 왕자와 공주가 결혼하는 것으로 끝나는 이유도 거기 있는것입니다. 그 결혼 이후의 삶을계속해서 동화에 옮기면 그 동화는 금방공포 소설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힘든 훈련 뒤에 용사가 탄생하듯이 가정에서의 그 거룩의 훈련은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필연적이며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만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감사하며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점차 그 가정 속에서 아귀다툼을 하는 횟수보다 복종과 사랑을 실천하며

천국을 경험하는 횟수가 많아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목적을 가지시고 부부관계, 부모 자식 관계, 종들과 상전과의 관계에

일반 법칙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며 남편은 아내를 목숨 걸고 사랑해야 하고

자식은 부모를 공경해야 하며 부모는 자식을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종들은 상전을 그리스도 모시듯 모셔야 하고 상전들은 종들을 형제처럼 대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정해 놓은 일반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반 법칙을 어기고 아내가 자식들 보는 앞에서 남편을 업신여기고 남편의 권위를 무시하고 멸시했을 때

그 자식들은 절대 권위에 대한 기대나 소망을 잃어버리게 되고 권위 자체에 대한 인식을 상실해 버리게 됨으로

사회는 총체적인 권위 상실의 시대로 심화되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그게 바로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 다원주의 그리고 뉴 에이지를 낳게 한 인류 재앙의 뿌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그 저주가 오늘 날 이러한 사회로까지 발전한 것입니다.

철학 사조의 변천사를 보면 인간의 역사가 어떻게 저주의 역사로 흘러가게 되는지 명확하게 그려집니다.

원래 인간들의 철학은 절대자와 절대 권위 그리고 초월 적인 것을 찾는 인간들의 자연스러운 욕구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런데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에 이르러 ““우리 인간들의 이성으로는 절대, 절대적이며 초월적인 것을 감지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 이후 인간들은 절대적이며 초월적인 것을 포기하고 상대적인 발전과 진보에 주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보다 나은 문화, 지금보다 나은 경제, 지금보다 나은 사회, 지금보다 나은 정치””

그 것은 헤겔의 변증법 ““정반합””에 이르러 더욱 더 확고하게 굳혀지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하던 인간들은 어느 지점에 이르러 한계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보다 나은 것을 향해 가긴가는데 거기가 어디냐““는 질문이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간들이 절대적인 것과 초월 적인 목적지를 상실하고 보다 나은 것을 향해뛰다보니

마치 연자 맷돌을 돌리는 소가 그렇듯이 목적지 없는 달음질을 하는 것처럼 허무함을 느낀 것입니다.

그 때 등장한 것이 실존주의 철학입니다.

개인이 가치나 의미라는 것의 기준과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실존주의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각기 다른 저마다 선의 기준과 가치의 기준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내가 옳다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내가 선하다 하는 것이 선한 것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내가 나의 소신을 따라 믿고 있는 종교에 대해 누군가가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면

그 사람은 자신의 소신을 무시하는 그 배타적인 자를 향해 칼을 뽑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그 배타적인 자의 자리에 기독교가 있는 것입니다.

절대 권위를 상실한 사람들, 유일한 목표지를 상실한 사람들은 서로 서로 자기들이 주장하는

선과 가치를 인정해 주며 손에손을 잡고 가고 있는데 그 중에 어떤 한 무리가 ““너희들은 다 틀렸고 우리만 옳다””라고

 절대 자기들과 섞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편협하다, 무례하다, 속이 좁다, 외골수다”” 이런 손가락질을 당하면서

그 칼을 다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없는 성도의 삶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반대 편 사람들은 모두, 절대 권위를 상실한 채 한 편으로 묶여 있습니다.

그것이 종교 다원주의이고 포스트모더니즘이고 뉴 에이지인 것입니다.

그게 다 어디서 출발한 것이라고요? 가정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가정에서의 일반 법칙이 깨어짐으로 절대 권위에 대한 기대와 인식이 사라지고

자기 자신이 선과 가치의 기준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제정해 주신 그 가정 안에서의 일반법칙은 소중하고 소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