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7. 13:24ㆍ김성수목사님
서울서머나교회
112.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앙이라는 것은.... - 에베소서68. “세상을 아껴 우리가 해야할 일 1”본문기록...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앙이라는 것은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어떤 힘 있는 존재에게 아부를 떠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나의 필요가 하나도 채워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분을 믿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 자료실 86참조. 사람은 마음으로(카르디아καρδία) ...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 누구 신지를 알고 그 분을 섬기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 분이 누구인지는 상관없고 그저 나를 지옥에서 구원해 주는 ““어떤 신””을 섬기고 계십니까? 왜 이 구분이 중요하냐 하면 나중에 가면 이 둘의 목적지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나의 구원이 목적이 되면 우리는 구원 그 이후의 삶을 경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나의 목적지가 되면 나는 나를 구원하신 그 크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오늘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구원관을 갖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삶이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술 취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동원하는 반면에 성령 충만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의 삶 속에서 드러내려 열심을 내는 것처럼 신앙은 나에서 하나님으로 나의 눈과 관심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 신앙이 ““나의 필요, 나의 구원”” 이러한 감각적이며 제한된 한계 속의 신앙으로 변질이 된 것은 여러 가지 근본적인 이유가 있지만 가장 악 영향을 받은 것이 바로 르네상스입니다. 기독교 역사 중 1,500년간은 오히려 지나치게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비하되고 맹신이 판을 치게 되고 성직자들이 고위 관리처럼 대접이 되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종교 개혁이 일어나고 르네상스, 문예부흥이 유럽을 강타하면서 지나친 신본주의가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이 강조되면서 성경의 계시까지도 인간의 이성의 심판을 거쳐야 계시로서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게까지 되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은 성경에서 가차 없이 신화나 설화로 매도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기독교는 극히 인간중심적인 종교로 변질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인본주의가 물질주의를 낳으면서 기독교는 급속도로 인간중심적이며 물질주의 적인 종교로 전락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당에 와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기보다는 “나의 유익과 나의 구원, 나에게 쏟아져야만 하는 은혜” 이런 것만을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항상 내가 중심입니다. 예수님을 말하고 하나님을 부르며 믿음과 은혜를 이야기하는데 그 이야기의 중심은 항상 “나”입니다. “나의 가족, 내가 속한 공동체”엄밀히 말해서 그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걸 우리는 ““죄””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예배당에 와서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눈물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감동한 그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 종교적 엑스터시나 감격은 어떤 종교에도 다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도 있고 힌두교에도 있고 이슬람교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나의 필요”에 초점을 두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우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배당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보이는 “나의 필요”를 구하는 사람들은 뭔가 감각적이며 눈에 보이는 증거들을 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지도 못 할뿐더러 그 것을 추구하지도 않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증거들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디서 제일 안심하는지 아세요? “큰 것과 다수가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감동적인 것”들을 추구합니다. “은사를 강조 한다든 가, 선교를 강조 한다든 가해서 다른 이들은 쉽게 경험 할 수 없는 것들을 우리는 할 수 있다”라는 자부심을 줍니다. “나의 필요”가 주 관심인 사람들은 그래야 안심이 되거든요. 내가 눈에 보이는 뭔가를 해야 하나님 앞에 떳떳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나의 필요”를 구하는 교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면서 교회라고 간판을 붙인 곳에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종교를 통해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늘어나 버렸고 그들을 유지하기 위해 너무 많은 기관들이 생겨나 버렸기 때문에 사람을 붙들어 놓아야 헌금이 들어오고 그래야 그 것들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동적인 프로그램들을 도입합니다.
윌로크릭 교회 같은 곳에 좋은 프로그램들이 많이 있지요? 한국의 대형 교회들이 그 프로그램을 도입해 가면서 수십만 불의 로열티를 지불하고 들여갔습니다. “제자훈련, 새 신자 훈련, 열린 예배”이런 것들을 수 십 만 불 씩 주면서 들여가는 의도가 뭡니까?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서입니다. 자식이 있는 많은 부모들이 어떤 교회를 찾습니까? 주일 학교에서 뭘 가르치든 그건 상관 안 하고 “우리 아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있나 없나” “우리 아이의 시선을 잡아끌어 줄 교육 프로그램이 있나 없나” 이런 것만 찾아다닙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뭘까요? 그들의 죄 성을 자극해 주는 프로그램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이 뭘 제일 좋아할까요? 죄 짓는 걸 가장 좋아합니다. 뭘 제일 싫어할까요? 고리타분하게 성경 가르치는 걸 제일 싫어합니다. 그런데도 교회들은 저마다 아이들 예배 때 연극을 한다, 음악회를 한다, 운동을 한다, 미술을 가르친다, 난리들을 떱니다. 부모들은 그걸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들이 저마다 좋은 프로그램들을 유치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입니다. 어떤 교회들은 신비한 성령의 은사를 강조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눈에 보이는 신비한 것과 자기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면 잠깐이지만 아주 안심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왕이면 예배당도 크게 짓습니다. 우스개 소리 같지만 큰 예배당에 계신 하나님은 뭔가 나를 위해 더 큰 일을 해 주실 수 있는 분으로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많아지고 예배당이 커지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나는 모두가 공인하는 안전한 공동체에 들어와 있다”는 안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경주해 나가야 할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큰 교회나 인기 있는 교회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일까요?
기독교는 공간의 종교가 아닙니다. 공간의 종교는 바알 신을 섬기는 종교입니다. 바알은 그의 신전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바알을 섬기는 여사제들과 성직자들, 혹은 일반 신자들이 그 신전에서 성 관계를 하면 바알이 흥분을 해서 비를 내려 주고 다산을 약속하는 그런 잡교입니다.
기독교는 시간과 역사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하는 것이지 공간의 종교가 아닌 것입니다.
(왕상8:27-30) 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28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그 성전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 때도 하나님이 그 성전에 계신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왕상8) 32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국문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 의로운 대로 갚으시옵소서 34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 열조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36 주는 하늘에서 들으사 주의 종들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가르쳐 주옵시며 주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신 주의 땅에 비를 내리시옵소서 39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44 주의 백성이 그 적국으로 더불어 싸우고자 하여 주의 보내신 길로 나갈 때에 저희가 주의 빼신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여호와께 기도하거든 45 주는 하늘에서 저희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 일을 돌아보옵소서
사람들이 큰 것과 다수를 좋아하는 것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게 될 때는 “나의 필요, 나의 구원”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일단 예수를 믿고 성숙해져 가면서 나의 관심의 초점이 옮겨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였을 때는 부모가 그저 나의 필요를 채워주고 나를 잘 키워 주어야 하는 분으로 인식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라면서 철이 들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그 부모에게 무엇을 뜯어낼까 보다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 뭘 드시면 건강하게 오래 사실까? 뭘 챙겨드리면 기뻐하실까? 이런 것을 고민하게 되듯이 우리가 일단 예수를 믿고 성숙해 져 가면서 우리의 관심의 초점은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15세기에 코페르니쿠스가 나오기 전에는 사람들이 이 우주의 중심이 지구인줄 알았습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도 달도 별도 전부 돌아가고 있다는 천동설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지구는 오히려 거대한 항성 주위를 돌아야 하는 행성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을 코페르니쿠스적 변혁이라고 부릅니다. 천동설에서 하루아침에 지동설로 바뀌어 버렸으니 세상이 얼마나 깜짝 놀랐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에 바로 그 코페르니쿠스적 대변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중심이었고 하나님이 나를 돕는 분이었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중심이고 내가 그 분을 위해 존재하는 코페르니쿠스적 대변혁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필요한 것입니다.
하긴 미국 전체 국민 중에 아직도 천동설을 믿는 사람이 33%나 된다고 하니 참 할 말이 없습니다. 이렇게 아직도 자기중심 적인 신앙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은 아직도 자기가 자기 인생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자꾸 힘을 키우려고 시도합니다. 재물과 명예는 물론이고 세상 적인 인기와 다른 이들의 인정, 이런 것을 추구합니다.
여러분은 아닌 것 같지요?
여러분이 “신앙이 좋다, 믿음이 깊다, 믿음이 뜨겁다”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을 한번 떠 올려 보세요. 여러분은 그 사람들의 무엇을 근거로 그들의 믿음을 좋다, 뜨겁다, 깊다, 라고 평가하십니까? “교회 일을 많이 하니까” “기도를 잘 하니까” “예배 시간에 잘 우니까” “성경을 많이 아니까”뭐 이런 것 아닙니까? 전부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로 사람들을 판단합니다.아직 멀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크고 작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온전한 전체가 우리에게 한꺼번에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입니다. 우선 예수를 믿으면 누가 믿음이 좋고 나쁨의 차이가 없습니다. 단지 믿음이 어떻 것인지를 열심히 상고하고 묵상하면서 누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믿음을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딤후3:14) 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갈3:23-26)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믿음은 예수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모두 같은 크기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걸 얼마만큼 내가 내 삶 속에서 누리는가가 바로 신앙생활을 통해 우리가 추구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그 온전한 믿음을 자꾸 까 보면서 “아 나에게 이런 것이 주어졌구나.” 하고 감격하며 그 믿음을 통해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영광을 자꾸 드러내는 삶을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앞에 항복해 들어가며 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을 우리는 신앙이 좋다고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 속에서 그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가 드러남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자꾸 깨져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고후4:6-7) 6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배를 품고 있는 질그릇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그대로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질 그릇이 깨져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겠지요? 그래서 예수를 잘 믿게 되면 여러분의 삶이 본의 아니게 자꾸 깨지는 모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저 사람은 어떻게 저 상황에서 저런 인내가 나올까?” “저 사람은 어떻게 저런 악한 사람을 저렇게 용서를 할까?”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까지 낮아지면서도 얼굴 하나 안 붉힐까?” 이렇게 우리는 우리가 깨지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 그 분의 속성을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걸 거룩,십자가,자기부인,성령충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신앙의 목적지인 것입니다. - 서울서머나교회 7분설교중...28번‘하늘들,우리들 안에 있는 그 것,하나님 나라’참조...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의 도구요 방법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의 방법이기도 하지만 십자가는 십자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채워져야 할 내용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지만 그 분이 우리 안에 들어 와 계신 것처럼 십자가의 원리는 그런 것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형벌의 모양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나를 죽여 원수를 살리는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 아니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잘 집대성하여 요약한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바보 취급을 받는 그 십자가가 하늘나라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원수들에게 수난을 당하시고 그들을 용서하시면서 억지로 이를 악 물고 참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속성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의 삶을 이 땅에서 그대로 재현해 내는 삶을 삶으로써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목표 지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그렇게 살다 가신 것처럼 계속 내 질그릇이 깨지며 부서지는 고통 속에 던져 지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 위해서는 그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지요?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서 가시적으로 우리가 볼 수 있게 보여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시죠? 그런데 우리는 그 분을 지금 뵐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배울 수 있습니까? 바로 그 예수에 관해 자세하게 우리의 수준에 맞게 기록해 놓은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요1:17)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5:39)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여러분이 열심히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속성을 배우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나”에서 초점을 옮겨 “하나님의 영광”으로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하고 가신 예수님을 설명하고 있는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것이고 우리의 모든 시간은 그리로 쏟아 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술 취하지 마십시오. 시간을 아끼세요. 여러분의 배 만을 위해 시간을 헛되게 쓰지 마세요. 그리고 성령 충만을 받으십시오. 성령 충만은 성경을 통하여 받으실 수 있습니다.
(합3:17-19)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빌3:8)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벧후3:18)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그노시스γνωσιςG1108)에서 (기노스코γινώσκωG1097)에서유래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아멘
(요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엘곤ἔργονG2041)이니라 하시니.
---묵상...........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기노스코γινώσκωG1097) 것이니이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 로마서 강해말씀 73번 '사망이 선물이고 선물이 영생이다'...참조(롬 6:23-7:7) (요일5:17-21) 17.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18.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에이도έἴδωG1492) 하나님께로서 -호라오ὁράωG3708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19.또 아는 것은(에이도έἴδωG1492)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20.또 아는 것은(에이도έἴδωG1492)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 된자를 알게(기노스코γινώσκωG1097)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 21.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자, 이제 뭐가 진짜 중요한 것인지 아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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